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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Mar 01. 2018

제주 2018, 그해 겨울 2_눈이 지겨워질 수 있을까

눈이 정말로 지겨워질 수 있을까.  녹을 때가 아닌 내리는 눈을 보며 지겨운 느낌이 올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언제나 자신이 없었다. 눈이 쌓인 채 겨울을 나본 적이 없을뿐더러 나름 세상을 통일된 색으로 뒤덮는 일사불란한 순간에 대해 지겨운 감정을 느끼기는 상당히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아니 생각도 해보지 못했던 일이 분명하다.


물론 눈이 녹을 때 느껴지는 허무함이나 구질구질함에 대해서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들이기에 눈 내릴 때와 녹을 때의 인상은 천지차이일 수밖에 없다.

올 겨울 따스함을 안고 포근히 지냈으면 하는 기대는 생각지도 못한 혹한으로 여지없이 허물어졌다. 더구나 눈 내릴 때 신이 날 것으로 여겨졌던 첫 폭설의 느낌이 그냥저냥 지난 후 이제 겨울 추위와 눈이 끝이려나 했는데 재차 다가온 폭설은 깜짝 놀라는 마음과 함께 힘들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천연덕스럽게 잦아들지 않는 매서운 날씨와 함께 덮쳐오는 눈을 바라보기가 두려워졌다. 늘 잘난채하듯 문명의 이기를 앞세우고 생활하는데 익숙한 상황에서 자동차를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차가 집에 세워진지 일주일이 넘은 듯하다.  바깥이 보이지 않는 집 구조상 모든 준비를 하고 나섰다. 그렇게 아직도 추운 날씨가 계속될 것이라 생각지 못했고 밤새 내린 눈이 여전히 내리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 역시 없었다. 눈과 날씨는 아랑곳 않고 포근함 대신 삭막함이 온 천지를 뒤엎는 당혹감을 안고 출근한다.

올 겨울 따스함을 안고 포근히 지냈으면 하는 기대는 생각지도 못한 혹한으로 여지없이 허물어졌다

옵션이 없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지난번의 경험 덕인지 버스도 이제 눈 속을 잘도 달린다. 크나큰 어려움 없이 버스가 제시간에 운행을 하는 느낌이다. 버스에 사람이 늘었다는 점 말고는 버스 운전사의 운전 솜씨는 여전히 놀랍다. 속도가 아찔할 만큼 빠르다. 용타. 미끄러지지 않는다.

차창밖의 풍경이 놓치기 아쉽다. 매일같이 다니는 출근길이지만 눈 덮인 농촌의 모습은 내가 시간을 거슬러 살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어린 시절의 시골 동네로 시간을 거슬러 온 것이 아닐까.

그렇게 아직도 추운 날씨가 계속될 것이라 생각지 못했고 밤새 내린 눈이 여전히 내리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 역시 없었다

제주의 시내가 아니라 농촌지역에서 사는 이유는 아날로그의 서툴면서도 정겨운 느낌을 주는 환경 때문이다. 그 안에서 나름 모던한 느낌이 동시에 살아있는 이중성의 묘한 격차가 살아있기에 좋은 것이리라. 단순히 깡촌이라고 느껴지는 시골지역이 아니다. 가장 현대적이고 첨단 문명과 멀어져 있지 않지만 여전히 그 문명의 범주안에 있으면서도 그리운 고향 같은 곳에서 사는 느낌. 버스에서 바라본 제주의 농촌에 내린 눈은 몇날 며칠을 내린 지겨움이 있었지만 여전히 정겨움이 훨씬 강하다.


다시 생각해 본다. 눈이 지겨울 수 있을까. 특히 막 내리고 나서의 눈 내린 모습이 지겨움으로 다가올 수 있을까. 요사이의 날씨를 보면 그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그 지겨움의 감정을 지속하기에는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매일같이 다니는 출근길이지만 눈 덮인 농촌의 모습은 내가 시간을 거슬러 살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출근하는 내내 퇴근 방법과 어려움이 걱정되지만 차들이 달리는 도로는 조금씩 녹아서 질척이는 곳도 보인다.  그곳을 달리는 길이 벌써 눈의 후유증을 이야기할 상황이라도 포기할 수 없는 공간이 있다.


어찌 너른 밭과 돌담 위에 쌓인 눈의 경치를 보면서 그리고 그 뒤로 잔잔히 평온을 되찾아가고 있는 바다를 보며 힘든 상황과 지겨움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또다시 생각한다. 눈이 지겹다. 며칠을 내렸는데 눈이 지겹다. 스스로에게 강요하듯 감정을 만들려 한다. 

눈이 지겨울 수 있을까. 특히 막 내리고 나서의 눈 내린 모습이 지겨움으로 다가올 수 있을까

사실 눈이 지겨운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교통이 마비되고 자동차를 버려둬야 하기에 지겹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추운 날씨에 내리는 눈은 힘들기는 하겠지만 그것은 눈 때문이 아니라 날씨가 차갑기 때문이다. 

눈으로 덮인 밭담은 인연의 끝이 이어져 있음을 느끼게 할 뿐 나로 하여금 무엇하나 긴장할 일 없게 만든다. 여전히 마음은 무언가 연결시키려는 불순한 의도만 남아 있으니 눈을 탓할 일이 아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의도에 새로운 변수가 생겨서 조금 뿔난 것이리라.


창밖 농촌의 풍경과 달리 시내에 도착한 모습은 마치 새로운 세상에 온 듯하다. 잠시 멈춘듯하던 도심에 눈발이 가차 없이 공격에 나섰다.  어찌 이 길을 그냥 정리하고자 하냐며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다니는 차량의 열기 덕분에 도로는 녹는 듯 쌓이는 듯 혼선이다. 지나는 버스와 트럭이 용감하고 맞설만하다. 

여전히 마음은 무언가 연결시키려는 불순한 의도만 남아 있으니 눈을 탓할 일이 아니다

머리에 모자를 푹 뒤집어쓰며 멀리서 다가올 버스를 기다린다. 다방에 앉아 쌍화차를 마시면 좋겠다. 조금은 쇠락한 분위기의 다방이었으면 좋겠다. 인사동의 옛 모습을 그려본다. 그런 곳에 가끔 다녀보던 시절도 있었고 깊이 없이 약간은 싸가지 없는 다방 종업원의 틱틱거리는 말투와 껌 씹는 소리를 기억한다. 그들과 벗 삼아 한두 시간 약속시간까지 시간을 보내던 시절이 있지 않았을까.


혹은 따스한 아메리카노의 현대적 따스함을 기억해도 무방하리라. 그렇게 눈은 기억의 연을 이어갈 뿐이지 내가 이 순간을 어떻게 기억하든 지겨운 모습 일리는 없지 않겠는가. 

포근히 내리던 눈이 사무실에 도착하니 더 정겨움으로 다가선다. 초가지붕 위에 눈이 내린다. 시골 한 복판이면 더 좋을는지 모르겠으나 도심 한복판이다. 이런 곳에 초가가 있어 다행이다. 옛적 달력에나 보임직한 풍경이다. 안거리 밧거리의 초가지붕 위로 언제나 그랬냐 싶게 소복이 눈이 쌓였다. 마당의 나무와 담벼락 위로 포송 포송 내리는 눈발을 바라보며 마음이 따스해진다. 뒤쪽 언덕이 그리움을 더해준다. 따스한 아랫목의 구들이 그립지만 나무 때는 연기는 나올 수 없는 구조. 무엇하나 버리기 어려운 풍경에 하루를 달랜다. 


집에 돌아가는 길이 조금은 따스해지지 않을까. 혹시 저런 집에서 돌아가신 어머니가 기다려주지 않을는지...

눈이 오래 내리니 생각의 폭도 다양하고 스펙트럼도 여러 가지다.


오래 눈이 내려 생각과 수많은 감성이 교차하는 그해 겨울이 될 것이다.


집 처마에 고드름이 열렸다. 오랫만에 보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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