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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솔 신간 『순수한 모순』 리뷰

문학이라는 중력, 창조라는 지루함, 떠밀려진 파괴-구원

by 임재훈 NOWer


김솔 연작소설집 『순수한 모순』 리뷰

문학이라는 중력, 창조라는 지루함, 떠밀려진 파괴-구원


소설가 김솔의 신작(2025년 6월 출간) 『순수한 모순』은 카프카, 보르헤스, 고골, 쿤데라 등 실존 문학인 네 명을 등장시켜 지어 낸 이야기입니다. 작가의 전작 『행간을 걷다』(2024)와 비슷하게, 가만히 책을 쥐고 앉아 발단-전개-위기-절정-전환-대단원이라는 정차역을 착실히 지나기만 하면 명확한 목적지에 다다르게 되는 서사극이라기보다, 독자 스스로 운전대를 잡고 알아서 길을 찾아내야 하는 일종의 오프로드 횡단 랠리 같은 소설입니다. 다 읽고 나도 내가 제대로 읽은 게 맞는지 확신이 잘 안 섭니다. 즉, 남들과 똑같이 읽고 감상하는 것이 불허되어 있을 뿐 아니라 애초에 아예 불가능한 책이랄까요. 소설가 김솔은 그런 텍스트를 설계하는 데 매우 특화된 작가인 것 같습니다.


『행간을 걷다』에 이어 『순수한 모순』에서도 저는 독자로서 저만의 운전을 했습니다. 우당탕탕 어떻게든 차를 몰고 나아갔습니다. 제가 도착한 곳이 어딘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오긴 왔습니다. 어떻게 여기 왔는지를 기록해 둡니다.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문학이라는 중력


싱어송라이터에게 음악이, 화가에게 그림이, 연출가에게 영화와 연극과 공연이 그러하듯, 글 쓰는 작가에게도 문학은 중력입니다. 제약임과 동시에 지탱해 주는 고정력입니다. 가장 존경하는 음악가, 제일 큰 영향을 받은 화풍,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은 영화인, 작가의 길로 이끈 운명적인 문장. 이런 걸 묻는 행위는 그러니까 상대방의 중력을 점검하는 일입니다. 무엇이/누가 당신을 이렇게 만들었나요? 어떤 힘에 떠밀려져서 여기 이렇게 있는 것인가요?


짓궂은 질문이고, 세상 쓸데없는 참견입니다. 묶어 두거나 박제해 놓으려는 시도처럼도 느껴집니다. 왜냐면 예술가는 중력에서 벗어나고자 분투하는 이들이니까요. 단일한 색채, 현상태, 모니즘 따위에 걸려들지 않으려고 부단히 손발을 움직이는—그렇게 해야만 생존하는 삶 속으로 스스로 뛰어든 시시포스(들). 일찍이 소설가 파스칼 키냐르는 “왜 작가가 되셨지요?”라는 인터뷰어의 싱거운 물음에 “왜 인간이 되셨지요?”라고 응수한 바 있습니다. 왜 인간이 됐느냐는 말은 곧 왜 태어났느냐는 말이지요.*

* 파스칼 키냐르, 샹탈 라페르데메종 지음, 류재화 옮김, 『파스칼 키냐르의 말』, 마음산책, 2018, 96쪽


『순수한 모순』을 이루는 연작소설은 총 네 편. 「편지」, 「신작」, 「장미」, 「롱괴르(Longueur)」. 「편지」에는 ‘FB’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카프카와 두 번 약혼하고 또 두 번 파혼한 실존 인물 펠리체 바우어(Felice Bauer)의 약칭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소설 본문에는 FB의 전체 이름이 언급되지 않으므로.) 「신작」에서도 보르헤스의 칭격인 듯한 ‘노작가’가 등장합니다. 「장미」는 고골을 특정 인물로 내세우지는 않으나 전반적인 분위기나 일부 소재들을 통해 고골의 「코」와 「외투」를 연상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다시, 「롱괴르」에서 밀란 쿤데라의 대역인 듯한 ‘MK’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스포일러가 될 것이므로(게다가 줄거리를 요약할 자신도 없으므로) 연작소설 네 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간단히 소개하고 싶습니다. 실존 인물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허구를 창조했다, 라고. 어쨌거나 『순수한 모순』은 전기나 평전이 아니라 소설이어서 작품 속 카프카, 보르헤스, 고골(의 작품 경향), 쿤데라는 실재를 바탕으로 한 상상의 산물입니다.


“이미 고인이 된 그들이 책에 남긴 문장이라도 인용하려면 각자의 저작권 보유한 자들의 동의를 반드시 구해야 했다—괜한 짓을 했다고 지금은 몹시 후회한다—. 수십 년의 법정 공방 끝에 프란츠 카프카의 유고를 차지한 이스라엘 국립 도서관은 카프카를 흑인 여성으로 상상하는 건 반유대적 선동이라고 반박했고, 밀란 쿤데라의 대리인은 평생 고인을 괴롭힌 “당신은 트로츠키주의자였습니까?”라는 질문에 또다시 대답해야 하는 게 몹시 불편했으며, 모스크바의 고골 박물관장은 자체적으로 마련해 놓은 표절 검증 과정과 배상금 계산 방식을 고급 영어로 설명했다. 호르헤 프란시스코 이시도로 루이스 보르헤스의 비서이자 두 번째 아내였던 마리아 코다마는 내 이메일에 끝까지 회신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그녀의 부음을 듣고 내가 그녀의 병증을 더 악화시켰다는 죄책감에 한동안 빠져 있었다.”

— 김솔, 「작가(들)의 말」, 『순수한 모순』, 사단법인 문학실험실, 2025, 180~181쪽


작가 스스로 “괜한 짓”이었다고 털어놓은 『순수한 모순』 쓰기. 저는 이 책을 작가에게서 사인본으로 증정 받았습니다. 책을 선물하고 작가는 “그걸 읽느라 시간 낭비하진 마시길!”이라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상당히 자기 파괴적인 겸손이네, 라고 생각하고서는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래서인지 제게는 『순수한 모순』이 ‘작가가 어쩔 수 없이 쓰고 만’, ‘쓰도록 떠미는 힘에 못 이겨서 써 버린’, ‘무언가에 의해 파괴된 자신의 파편들을 이어 붙여 조성한 창작물’로 다가왔습니다.



창조라는 지루함, 떠밀려진 파괴-구원


실존 인물(특히 유명인) 혹은 기존 창작물을 실재와는 다른 방식으로 활용해 이야기의 전면에 부각하는 소설 창작은 그리 낯선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사르트르, 들뢰즈, 야스퍼스, 알튀세르, 푸코 등등 현대 철학자들을 실명으로 등장시킨 일종의 추리 소설 『언어의 7번째 기능: 누가 롤랑 바르트를 죽였나?』(로랑 비네 지음, 이선화 옮김, 영림카디널, 2018), 카뮈의 『이방인』 그후의 이야기인 『뫼르소, 살인사건』(카멜 다우드 지음, 조현실 옮김, 문예출판사, 2017) 같은 작품들이 이미 존재합니다. 그런가 하면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2019)라는 영화는 이소룡, 로만 폴란스키, 샤론 테이트 등 실존 영화인들을 주요 소재로 사용했지요.


저는 이 사례들이 전부 ‘파괴’ 행위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작가 스스로 영향을 받은 수많은 위인들, 그 중력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파괴적 창작 시도의 일종으로 규정하고 싶습니다. 중력을 벗어난다는 게 중력을 배척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애시당초 중력을 거스를 수도 없습니다. 다만,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파괴적’ 행위의 반복이 작가로 하여금 또다시 중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제공한다고 믿습니다. 그런 욕망이 없다면 뭔가를 쓰고 그리고 만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요. 예술가에게 자기 파괴는 그래서 자기 구원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창조의 능력이 주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그것은 신을 모방하려는 잘못된 시도이다.

창조의 능력이 없음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과오가 생겨난다. 우리는 창조 행위를 모방해야만 한다. 두 가지 모방이 있다.(하나는 실재의 모방이고, 다른 하나는 겉모습의 모방이다). 보존하기와 파괴하기.

보존 속에는 ‘나’의 흔적이 없다. 파괴 속에는 있다. ‘나’는 파괴를 통해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

상상의 악은 낭만적이고 다채롭다. 실재하는 악은 음산하고 단조롭고 삭막하고 지루하다. 상상의 선은 지루하지만, 실재하는 선은 언제나 새롭고 경이롭고 도취시킨다. 그러므로 ‘상상력의 문학’은 지루하든가 아니면 부도덕하다(혹은 두 가지가 섞여 있다). 문학이 지루함과 부도덕의 양자택일에서 벗어나려면, 예술의 힘을 빌려 어느 정도 실재 쪽으로 가야 한다. 천재들만이 할 수 있는 일.”

— 시몬 베유 지음, 윤진 옮김, 「악」, 『중력과 은총』, 문학과지성사, 2021, 96~97쪽


“예술의 힘을 빌려”, 그러니까 중력에 영향 받음과 동시에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리기.

감히 “신을 모방하려는” 창조라는 ‘악’.

그 악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찾아오는 낭만과 다채로움. 이른바 예술가연, 작가연.

그러나 실행에 옮긴 창조 행위의 지루함을 견뎌 내는 이들은 몇 안 되고. 날마다 쓰기, 매년 발표하기의 버거움.

창조라는 악의 반대, 즉 창조 안 하기라는 ‘선’. 상상만 해도 지루해지는. 예술을 포기하고 나는 살아갈 수 있는가.

그러나 정작 창조 안 하기의 삶을 맛보게 되면, 그만 한 삶이 또 없고. 남들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보편의.

따라서 “예술의 힘을 빌려 어느 정도 실재 쪽으로”라는 말은 역시, 중력에 영향 받음과 동시에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라는 명령.


“할 수밖에 없다. 행동이 아니라 일종의 수동이다. 행하지 않는 행동.

(⋯) 행동의 동인을 자기 밖으로 옮길 것. 그것에 떠밀릴 것.”

— 앞의 책, 65쪽


“사람들이 우리에게 빚진 것은 바로 그들이 우리에게 줄 거라고 우리가 상상한 것이다. 그 빚을 탕감해줄 것.”

— 앞의 책, 18쪽


“당신의 나라엔 롱괴르와 치환될 단어가 없다는 말인가요? 세상에나. 이 단어는 이 작품에서 아주 중요한 단어이기 때문에 당신처럼 풀어 쓰면 절대 안 돼요. 차라리 프랑스어로 소리 나는 대로 옮겨주세요. 대신 암호나 열쇠로 작동하도록 각주를 생략해주세요.”

— 김솔, 「롱괴르」, 『순수한 모순』, 158~159쪽


“그걸 읽느라 시간 낭비하진 마시길!”

— 김솔, 『순수한 모순』을 선물하며 남긴 메시지


프랑스어 롱괴르(longueur)는 사전에 ‘길이, 완만, 더딤, 지루함’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의 언급대로 딱 맞는 어의가 아니지요. 밀란 쿤데라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롱괴르’는 쿤데라 소설의 ‘느림’, ‘시간의 지연’과 같은 문학적 정서를 설명하는 개념어로 쓰이기도 하니까요. 소설가 김솔의 창조대로 어떤 낱말은, 또는 어떤 대상-존재는 “소리 나는 대로”, “암호나 열쇠로 작동하도록” 가만 내버려 둘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그런 걸 창조해 내는 자도 계속 그런 걸 창조해 내도록 그냥 놓아 두어야 하고요.


카프카, 보르헤스, 고골, 쿤데라가 『순수한 모순』에 빚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들이 이 작품에, 또는 저자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줄 거라고 우리 모두가 상상한 것입니다. 저자 김솔은 채권자 대표로서 그 빚을 탕감하기 위해 “괜한 짓”과 “시간 낭비”라는 중력에 떠밀려지고 끌어당겨진 게 아닐까, 하는 감상을 해 봅니다.


도서 리뷰입니다만⋯ 무슨 소리를 늘어 놓은 건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독후감이라기보다는 『순수한 모순』에 대해 제가 독자로서 품었던 온갖 생각들을 어거지로 글 한 편에 욱여넣은 것에 가깝습니다.


전작 『행간을 걷다』를 읽고서는 저자 김솔에 대하여 “세상의 수많은 양자적 가치에 ‘행간’이라는 힘든 길을 낸 소설가. 그 ‘사이’라는 세계의 지은이”라는 문장을 썼었는데, 이번 『순수한 모순』 리뷰(를 빙자한 잡문)에도 반복하고 싶습니다. 여전히 그 길을 내고 있는 작가를 가만 내버려두고 싶으니까, 신간이 나올 때마다 찾아 읽겠습니다.


김솔 신간 연작소설집 『순수한 모순』 정보

- 교보문고 / 알라딘 / 영풍문고 / 예스24

- 출판사 ‘사단법인 문학실험실’ 인스타그램 @munhaksilh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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