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것들에 홀리다

[평일의 의식의 흐름. 여름] #22

by 임재훈 N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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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멘트 벽돌로 세운 높은 담벼락에 그려진 채색화. 양회색 석재 표면을 캔버스 삼아 왼편 공간부터 차례로 침팬지 한 쌍, 코뿔소, 코끼리, 기린 등이 늘어서 있다. 그중 몇 마리는 색이 심하게 바랜 탓에 동물의 형상만을 어렴풋이 드러내기만 할 뿐 종의 본형과 본색은 잃어 가는 중이다. 전체 벽면은 결로 현상으로 인한 곰팡이인지 거뭇거뭇한 얼룩투성이에, 담쟁이넝쿨의 일종인 듯한 식물 줄기 몇 가닥까지 드리운 모습이다. 슬쩍 일별했을 때는 좀 을씨년스러워 보였는데, 가만 멈춰 서서 들여다보니 제법 운치가 있다. 거무뎅뎅한 자국들과 덩굴 가닥들이 각종 포유류들과 어울리니 마치 야생의 환경을 표현한 이미지 같다. 게다가 가장 큼직한 데다 보존 상태도 양호한 유인원 두 마리의 표정이 하도 거룩해서(관음보살상의 미소와 비슷하다 묘사한다면 지나친 호들갑일까?), 내 눈앞의 이 시멘트 담벼락 전체가 원시인들이 대지모신을 찬양하며 남긴 고분 벽화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또 눈에 띈 것은 어느 낮은 주택의 검박한 대문이다. 딱 어른 한 사람이 드나들 만큼의 높이와 너비. 색감과 질감 때문에 당연히 나무문인 줄 알았는데 다가들어 살피니 녹슨 철문이었다. 부식된 쇠를 목재로 착각하다니. 가까이 가 보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면, 나는 오래도록 그 문의 무늬를 나뭇결로 알고 살았을 것이다.

도시의 오랜 벽화 앞에서 고대로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시간의 깊이를 헤아리고, 주택가의 부식된 철제물에서 나무의 성질을 감각하게 되는 이 성마른 상상력과 하찮은 관찰력⋯. 멍하니 걸어가다가 낡은 것들에 그만 홀리고 말았다고 변명하고 싶지만, 낡음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냥 거기 있었을 뿐. 실체보다 더 장엄하게, 실상과는 전혀 다른 재질로 대상을 과장 혹은 오인한 주체는 바로 나다. 딱 존재한 만큼만, 존재하는 방식대로만 바라보는 연습을 더 해야겠다, 타인에게 그렇게 비춰질 나 자신이 부끄럽지 않은 노인으로 낡고 늙어 가야겠다, 라는 교훈을 되새기며 집으로 총총.






사진수필 『평일의 의식의 흐름』(2025)

- 글과 사진. 임재훈

- 저자 소개. 포트폴리오 / 인스타그램


※ 『평일의 의식의 흐름』 브런치북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편으로 분재됩니다. 각 계절당 25편의 글과 그보다 많은 사진들을 실을 계획입니다. 혹시 모를 무단 전재 및 배포 행위를 예방하고자 브런치북에는 원본 사진이 아닌 해상도(용량)를 줄이고 텍스타일 효과를 입힌 사본을 게재합니다. 추후 출간 작업이 진행되면 출판사와 원본 사진들을 공유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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