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의 의식의 흐름. 겨울] #5
서울 우이동의 도심 속 사찰 도선사(道詵寺). 깨달음(道)이 모여드는(詵) 곳. 통일 신라 경문왕 재위 2년인 862년 승려 도선에 의해 창건되었다. 남북국 시대 때 세워진 그야말로 천년 고찰이다. 주소는 서울특별시 강북구 도선사길 278. 내가 사는 거주지와는 약 5킬로미터 거리다. 자차로는 15분 남짓이면 도착하지만 간선버스를 탈 경우 한 시간, 걸어서 가면 그보다 20분쯤 더 소요된다. 대중교통과 도보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 버스에서 하차해 걸어가야 하는 구간만 거의 3킬로미터라서 그렇다. 평보로 40분은 족히 걸릴 거리인 데다 경사도 가파른 굽잇길이다. 북한산 둘레길로 치자면 7코스 옛성길이나 14코스 산너머길에 버금가는 준로다. 그래서 도선사에서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30분 간격으로 셔틀버스를 운영한다. 간선버스 종점(우이동 차고지)에서 셔틀버스를 타면 ‘청혜도원(淸慧道園)’이라는 일종의 경내지 내 신도 대합실에서 내릴 수 있다.
이런 경로를 알아보다가 머리를 흔들고는 그냥 깔끔하게(?) 걸어가자고 마음먹었다. 대체 무슨 자만심이었을까. 버스 타고 내리고 환승하는 일이 뭐 그리 번거롭다고. 평소에 운동도 잘 안 하는 주제에 평지 2킬로미터, 오름길 3킬로미터를 겁도 없이 걷겠다고 나서다니. 겨울 도행 미숙자답게, 목폴라에 두꺼운 패딩을 껴입고 800그램짜리 50밀리미터 단렌즈를 결속한 미러리스 카메라까지 둘러멘 채 보무당당히 출발했다. 평지는 그럭저럭 갈 만했지만, 셔틀버스 승강장이 있는 간선버스 종점을 지나면서부터 체력이 달리기 시작했다. 오르막길 진입 후에는 얼굴과 상체가 온통 땀투성이라 순식간에 후줄근해지고 말았다. 결국 패딩을 벗어 손에 쥐고 올라갔다. 한 발짝 뗄 때마다 덜렁거리는 카메라를 수시로 진정시켜야 했고, 그 와중에 움켜쥔 패딩을 몇 번 떨어뜨리기도 했다. 기진맥진한 나머지 악력도 약해졌던 것 같다. 보행자 전용로가 고갯길 초입부터 쭉 이어진 게 아니라서 상당 구간이 이차선 차로의 갓길이었다. 걷는 동안 두어 번인가 도선사 셔틀버스가 내 옆으로 오르내렸다. 그냥 저거 탈 걸⋯⋯. 땀벌창 둔치가 후회해 봤자 승합차는 멈춰 주지 않는다. 아무리 대자대비한 불가의 차량이라도 ‘주행 중 급정거’라는 도로교통법 위반을 저지를 수는 없으니.
그나마 계속 걸을 수 있도록 무언의 독려가 되어 준 요소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나처럼 걸어 올라가는 사람들. 다문다문, 느릿느릿, 그분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전진한 덕에 ‘그래도 나만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 아니구나’ 하고 안심했다. 그러나 이내⋯ 보폭이 시종일관 일정하고(그렇다는 건 호흡이 고르다는 뜻이다) 옷차림 또한 그리 두껍지 않은 동절기 기능성 등산복임을 알아보고 나서야 이 길을 한두 번 오르내린 분들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제각기 등에 멘 소형 배낭 안에는 아마도 여분의 경량 패딩 한 벌이 돌돌 말려 있을 것이다. 도선사의 소재지가 고산지대는 아니지만 그래도 해발 고도 300미터 이상인 산자락이다. 골바람과 고추바람이라도 맞는다면 체온이 급격히 떨어진다. 그럴 때 바로 입어야 할 방한복을 땀에 젖지 않게 관리하는 것은 상식일 터. 그러니 다들 단출하나마 배낭을 챙긴 것이다. ‘미쉐린 맨’ 같은 올록볼록 오리털 패딩에 무거운 카메라까지 이고 땀이나 뚝뚝 흘리고 있는 미련퉁이 나 자신과 그분들을 ‘동급’으로 묶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나만 이러고 있지 않다’라는 처음의 설된 안도감이 ‘나만 이러고 있다’로 전복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또 희한하게도 이런 부끄러움이 나를 계속 걷게 했다. 스스로를 한심히 여기는 마음이 육체 피로를 압도했다고 해야 할까. 하여간 몸의 힘듦이 조금은 가시는 느낌이었다.
두 번째 요소는 나를 잠깐 멈춰 앉힘으로써 이어서 또 걷도록 독려해 준 바위였다. 비유가 적절할까 싶지만, 마치 영화 ⟨범죄 도시⟩의 마석두 형사가 우람한 삼각근과 양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쪼끄마한 소꿉놀이용 모형 의자를 건네는 양으로 바윗덩이 앞에 벤치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눈앞의 거대한 위용에 일단은 기가 눌려서, 넙죽 호의를 받아도 되는지 판단이 잘 안 섰다. 우습게도 바위 눈치를 보고 서 있었던 셈이다. 뭐랄까, 천년 고찰과 가까워질수록 길가의 암괴 하나조차 기운이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던 것 같다. 오래전 캐나다 퀘벡을 여행하며 노트르담 대성당에 갔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소재지인 몬트리올 시내에서는 보도 블록 하나도 조심히 밟게 되었다. 사소한 것들을 상서롭게 바라보는 시선이 일시적으로나마 활성화된 듯했다. 종교 유적 관광의 특이점이라 해야 할까.
식은땀이 오한을 불러올까 무서워 바로 패딩을 입고는 조신히 벤치에 앉았다. 혹시나 저온 환경 탓에 카메라 배터리가 방전될까 봐 장갑 낀 양 손바닥으로 기기를 감쌌다. 내가 이리 부산을 떠는데도 바위는 그저 가만하다. 행동거지가 진중한 사람을 왜 ‘바위 같다’고 표현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내 앞의 거석은 이른바 ‘붙임바위’. 돌멩이를 바위 표면에 댔을 때 떨어지지 않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신(俗信)이 전해진다. 이 바위에 붙거나 떨어진 돌들은 몇 개일까. 천년 세월에 얼마나 많은 간절함들이 이 돌덩이 앞을 서성였을까. 헤아릴 수도 없는 걸 상상해 보자니 머리가 아득해진다. 이 바위는 도선사 아랫길에 있다. 조금만 올라가면 대웅전 불단 앞에 설 텐데, 어찌 여기서 벌써 제 소념(所念)을 바윗돌에 빌었을까. 석가여래는 원을 이뤄 주는 구세주가 아니라 전부 내려놓으라 얘기하는 각자(覺者)라서일까. 다 내려놓을 각오로 이 산길을 올랐지만, 막상 부처 곁에 다다르니 도저히 포기 못할 꿈이 문득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바위는 일종의 보관함 역할을 한 셈이다. 세속의 생활인들이 훌훌 일주문을 통과해 법당 안에 들어서도록, 그들 안의 가장 큰 욕망 한 알씩을 바위가 대신 보관해 준 것이다. 불심을 희구하나 출가 대신 수신제가를 택한 보통의 존재들이 남긴 ‘돌멩이’들. 붙임바위가 맡아 온 그 천년의 알알은 전부 누군가의 생의 조각들이다. 그러니 이 바위의 자리는 범상함의 성소라 할 수 있다. 무소유를 설법하면서도 절 아래 ‘소원 들어 주는 바위’의 존재 또한 긍정하는 둥근 모순. 불가 고유의 가르침인 중도(中道) 사상을 이 붙임바위 앞에서 배운다.
다시 힘을 내 걸어 도선사 경내에 당도했다. 곳곳이 개축 공사 중이라 각종 자재와 안내판 등이 많았다. 내가 기대했던 천년 고찰의 창고한 풍경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기분은 좋았다. 이런 나도 걸어서 올라왔으니. 내려가는 길은 당연히 가볍고 수월했다. 땀 한 번 안 흘렸고 패딩도 안 벗었다. 집에 도착해 SD 카드를 확인해 보니 사진들이 몇 장 없었다. 그나마 제대로 나온 거라고는 붙임바위 벤치에서 찍은 두세 컷과 경내지 정경 몇 컷이 전부였다. 이럴 거면 카메라는 뭐 한다고 들고 갔니. 이 미련퉁이. 하아⋯⋯. 한숨을 푹 내쉬다 붙임바위 사진을 보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사진 많이 찍어 오려던 내 욕망도 저 바위가 맡아 준 것이겠거니, 오늘의 하찮은 내 도행도 천년 세월의 돌멩이들 중 하나로 저 바위 밑 어딘가에 잘 있겠거니, 했다. 바위가 대뜸 와불로 보였다.
사진수필 『평일의 의식의 흐름』(2025)
- 글과 사진. 임재훈
※ 『평일의 의식의 흐름』 브런치북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편으로 분재됩니다. 각 계절당 25편의 글과 그보다 많은 사진들을 실을 계획입니다. 혹시 모를 무단 전재 및 배포 행위를 예방하고자 브런치북에는 원본 사진이 아닌 해상도(용량)를 줄이고 텍스타일 효과를 입힌 사본을 게재합니다. 추후 출간 작업이 진행되면 출판사와 원본 사진들을 공유할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