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프랙탈, 김언희 시인
단어를 찾아서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솟구치는 말들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사전에서 훔쳐 일상적인 단어를 골랐다.
열심히 고민하고, 따져보고, 헤아려보지만
그 어느 것도 적절치 못하다.
가장 용감한 단어는 여전히 비겁하고,
가장 천박한 단어는 너무나 거룩하다.
가장 잔인한 단어는 지극히 자비롭고,
가장 적대적인 단어는 퍽이나 온건하다.
그 단어는 화산 같아야 한다.
격렬하게 솟구쳐 힘차게 분출되어야 한다.
무서운 신의 분노처럼.
피 끓는 증오처럼.
나는 바란다. 그것이 하나의 단어로 표현되기를.
고문실 벽처럼 피로 흥건하게 물들고,
그 안에 각각의 무덤들이 똬리를 틀기를,
정확하게 분명하게 기술하기를,
그들이 누구였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 내가 듣는 것,
지금 내가 쓰는 것,
그것으론 충분치 않기에.
터무니없이 미약하기에.
우리가 내뱉는 말에는 힘이 없다.
그 소리는 적나라하고, 미약할 뿐.
온 힘을 다해 찾는다.
적절한 단어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찾을 수가 없다.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비스와바 쉼로르스카, 「단어를 찾아서」 전문
“저는 71세 생존자입니다.”
라는 인사말로 시작한 김언희 시인. 우리 지역의 시인이다. 더불어 지역에서 중학교 교사였다. 내가 학교에 근무할 때 영어교사로 재직하셨으니까 어쩌면 학교에서 같이 지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억에는 없다. 아마도 겹치는 시간이 한 번쯤은 있었을 수도 있겠다 싶지만 기억에는 없다. 시인은 주로 시골학교를 선호했고 시내 학교에서도 도서실이나 양호실, 창고를 쉼터로 사용했으니 그랬겠다 싶다. 그것도 대부분 수업은 4,5교시였고 점심은 항상 서서 먹고 업무는 그 점심시간에 했다고 한다. 1.2.3교시는 항상 당신을 위해 쓰는 시간으로.
언제쯤 그녀의 시를 접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어느 강연자의 입술을 통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궁금해졌을 것이다. 그녀의 시를 처음 봤을 때 충격이었다. 시어를 어떻게 저렇게 고를 수 있을까? 왜? 무슨 이유로? 그때부터 시인을 만나고 싶었다. 시편이 아니라 사람으로. 실물로. 직접 보고 듣고 느끼면서 시에서 말하지 않는 것을 알고 싶었다. 그날이 오늘이었다.
자리에 앉기 전에 본 첫인상이 어머니 분위기다. 70년을 넘게 이땅에 살았으니 그러하리라.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다 치르고 나면 그렇지 않을까 싶다. ‘단어를 찾아서’를 읽고 시작하는 강연. 참석자들도 집중하고 공감한다. 다들 시나 줄글을 쓰는 사람,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니 그럴 것이다. 글을 쓰는 이들은 언제나 단어가 궁하다. 딱 들어맞는 그 하나의 말을 건지지 못해 고심하는 이들이 작가다. 그 진리를 한 편의 시로 확인하니 가슴이 마구 요동친다.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찾기 힘든 그 단어를 찾아 헤매는 작가의 마음을 그린 시를 선물로 갖고 와서 풀어 놓는다.
‘단어를 찾아서’는 그녀가 들고 왔다. 모든 시작(시작)에 앞서 이 시를 먼저 쓴다고 한다. 필사나 타이핑을 한 후에 그녀의 시를 쓴다. 마치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제를 지내는 의식과 같은 절차다. 이 시를 보고 나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그녀의 역사도 있다. 이 시를 거룩한 종교의식처럼 읽고, 쓴 연후에 자기 언어를 끌어올린다. 본인 시어를 끌어내기 위한 마중물이라고 하면 될까?
“여기에 뭐 하러 왔어요? 뭔가 배우려고, 공부하려고 왔어요?”
참석자들은 대부분 고개를 끄덕였고 그 중에 제일 심하게 앞뒤로 흔든 사람이 바로 나였나 보다. 평소 그곳에 가면 기본 10분은 지각하고 한쪽 모퉁이에서 조용히 듣기만 하고 쏜살같이 집으로 와버리는 나다. 그런데 첫 질문자로 지목이 되었다. 횡설수설 뭐라고 순간의 생각을 질문으로 섞어 던지니 시인은 단번에 알아차린다.
“언어의 한계에 대한 질문인가요? 자기 언어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궁금한 거지요?”
이어서 현자의 목소리로 지혜롭게 이끈다. 먼저, 자기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
1. 자기 전공과 다른 영역 책 읽어라. 평소와 다른 세계 관심 갖는 것도 중요하다. 미국 코미디 프로그램 시청을 권유한다. ‘데이비드 샤펠’, 시인은 실패한 코미디언이다. 그러니 시인과 코미디언은 크게 다르지 않다. 즐겨 보라.
2. 예술가로서 살아남으려면 경계에 서라. 한 발도 물러나지 마라.
3. 많이 읽어라. 한 줄을 쓰기 위해서는 백 줄을 읽어야 한다. 1:100. 작품은 먹은 대로 나온다.
4. 나무의 성장은 찢어짐이다. 씨앗에서 떡잎이 나올 때 두 갈래로 찢어진다. 벌어진 두 이파리 사이가 그 떡잎의 자기 스펙트럼이다. 나무의 프랙탈을 보라. 찢어짐의 연속이다. 그리고 자기복제다. 위로 자란 나뭇가지보다 뿌리는 여덟 배로 더 많이 찢어진다. 겉으로 보이는 가지, 하늘로 뻗어 오른 나뭇가지만큼 땅 아래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뿌리가 뻗어 자란다. 위로 자라려면 아래로 그만큼 깊어져야 한다.
5. 혼자서 가지 마라. 그러다가 자기 세계에 함몰된다. 이팀 저팀 옮겨 다니며 갈짓자로 헤매지 마라. 좋은 팀을 선택하여 일직선으로 함께 가라.
두 시간 가까이 함께한 시간은 ‘기쁨’과 ‘영광’의 시간이었다. ‘만나서 기뻤습니다’라는 시인의 사인과 첫 질문자로서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인 나의 단어가 만나서 춤추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겁다. 이곳에서 세 번의 강연을 했으니 지역민을 위해서는 할 만큼 했다고 한다. 앞으로 더 이상 만남의 자리는 없다고 선을 긋는다. 시인의 심장도 염려가 되고 첫 만남이 마지막이 될까 두렵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