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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박을 내리면 한가득 달빛을 퍼 올릴 것 같았다. 그날 밤에 만난 남자는 분명 강한 자기장에 끌리는 듯한 느낌이라고 했다. 조금 전 그랬던가. 확실치 않았다. 단지 흙 속에 무언가가 있다고 강하게 느꼈을 뿐이었다. 남자의 주장과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뭔가를 감지한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판 구덩이에서 전혀 느끼지 못한 강렬한 느낌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까지 판 구덩이와 다른 더 깊고 넓은 구덩이가 필요했다. 그래야만 그것을 확실하게 그것을 찾을 수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았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제멋대로 자란 옥수수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삽을 집어 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적의 목을 치듯 삽을 휘둘렀다. 옥수수가 퍽퍽 쓰러졌다. 삽날이 옥수수의 목을 뎅강 뎅강 잘랐다. 이윽고 그가 삽을 멈추었을 땐 구덩이를 중심으로 널찍한 공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는 흡족한 표정으로 잘린 옥수수를 걷어내고 구덩이를 들여다보았다. 강렬한 기운이 발산되고 있었다. 큰 물고기가 걸린 낚싯대를 잡은 것처럼 흥분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확신할 수 없었다.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해야 했다. 담배가 필요했다. 주머니를 뒤졌는데 담배가 없었다.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두고 집을 나온 것이다. 집에 다녀오기엔 너무 멀었다.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누군가 구덩이를 차지할 수 있었다. 담배가 없는 걸 알고 나자 이상하게도 더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그는 옥수수 이파리를 뜯어 질겅질겅 씹었다. 입안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썼다. 이파리를 내뱉고 구덩이를 빙글빙글 돌았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담배 생각을 잊기 위해서 그는 지난달에 있었던 어머니 장례식을 떠올렸다.
지난달 3년 동안 연락이 없던 여동생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막 퇴근해서 집에 도착할 무렵이었다. 여동생은 거두절미하고 오랫동안 치매를 앓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하고 매몰차게 전화를 끊었다. 황망했다. 잠시 우두커니 서 있던 그는 정신을 차리고 옷장에서 검은색 양복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동네 입구에서 운 좋게 택시를 잡아탔다. 고속버스 터미널을 향해 달려가던 택시는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다. 러시아워였다. 조금씩 속도를 낮추던 택시는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도로에 늘어선 자동차들이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렸다. 택시 기사는 아무렇지 않은 듯 코를 킁킁거리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불렀다. 막차 시간이 빠듯했다. 정체가 풀리지 않는다면 막차를 놓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고속 터미널로 가는 길은 꽉 막힌 도로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택시는 가다가 서기를 반복했고 축농증이 걸린 기사는 계속 코를 킁킁거리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봤다는 여자 가수의 노래를 듣고 있던 그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밤마다 구덩이를 팠던 그는 늘 잠이 부족했다. 옥수수밭으로 들어갈 때마다 구덩이를 하나만 파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잘 지켜지지 않았다. 하나만 더, 하나만 더하며 구덩이를 파다 보면 어느새 날이 훤하게 밝아오기 일쑤였다. 그래서인지 낮에는 회사와 집을 가리지 않고 늘 졸았다. 누군가 어깨를 흔드는 바람에 눈을 번쩍 떴다. 택시 기사의 샛노란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손님,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여기가 어딥니까?”
“저수동입니다.”
“난 고속 터미널로 가자고 했는데요?”
“분명히 저수동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택시 기사가 소형녹음기를 꺼내 스위치를 누르자 저수동으로 가자는 자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택시 기사가 코를 킁킁거리며 녹음기 스위치를 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