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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복이 Aug 07. 2022

괜찮다는데도 옥수수를 삶아 가져다줬다.

- 나눔도 세심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애들이 옥수수 좋아해요?”

“좋아하죠. 근데 내가 귀찮아서 안 삶아줘ㅋ”

“그럼 이따 갈 때 내가 삶아갈게.”

“관둬요. 더운데 무슨, 그러지 마요.”


지난 주말 아버지가 옥수수를 자루에 담아 주셨다. 우리 아들이 옥수수 킬러라 앉은 자리에서 3개를 먹는 걸 보고 그리 하신 거라서 마다할 수가 없었다. 어른들은 늘 뭘 주고 싶어 하시고 그걸 받아 가면 좋아하신다. 안 가져가면 섭섭해 하시기도 한다. 그 마음을 알아서 시골에서 주시는 건 대체로 다 받아오는데 못 먹고 버릴 때도 있다. 늘 가져가서 썩히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했다가도 막상 가져오면 그게 잘 안 된다. 그래서 요즘에는 솔직하게 말씀드리며 보관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아주 조금만 받아 온다. 그러나 아들이 잘 먹는 모습을 보고 옥수수 한 자루를 덥석 받아오고 말았다. 


마음을 무겁게 누르는 베란다의 옥수수 자루. 딱 하루 지났는데도 마음이 무겁다. 날씨도 덥고 습한데, 어서 삶아서 냉동실에 넣어야 하는데. 다들 아시겠지만 옥수수를 삶아서 냉동실에 보관하면 두고두고 먹을 수 있다. 물론 그마저도 잊어버리고 1년의 시간이 지나기도 하지만 말이다.(내 냉장고에도 작년에 수확한 옥수수가 있을 것 같다.) 문제는 냉동실에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냉장실은 얼마 전 대대적으로 정리를 해서 산뜻해졌는데 냉동실은 아직 손도 못 대고 있다. 냉장고 파먹기를 위해 저 곳을 뚫어야 하는데, 맨날 위층만 손대고 만다. 좀 더 깊은 곳에는 무엇이 잠자고 있을지 알 수가 없다. 


그러던 중 오늘 아들이 친구 집에 놀러갔다. 저녁도 얻어먹고 놀다 온다고 한다. 갑자기 저녁 시간이 한가해진 나는 순간 옥수수를 떠올렸다. 한 자루의 옥수수 모두 껍질을 까서 냄비 두 개로 나눠 삶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들 친구의 엄마에게 옥수수를 좀 나눠줄까, 하고 카톡을 보냈던 거다. 당연히 괜찮다고 했지만 나의 작업은 이어졌다. 너무 많이 가져다주면 부담스러울까봐 대여섯 개만 싸서 아들을 데리러 갔다. 다행히 그 집 아이들이 잘 먹었다고 한다. 집에 돌아 온 후 나머지 일부는 또 냉동실에 욱여넣었다. 1년이 지나기 전에, 부지런히 아들도 먹이고 주변의 눈치를 잘 살펴서 또 나눔을 해야겠다. 


사실 ‘나눔’이라는 게 내 입장에는 ‘나눔’인데 상대 입장은 알 수가 없다. 속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나만 해도 상대가 괜찮다는데도 기어이 옥수수를 삶아서 가져다 줬다. 애들이 잘 먹었다는 게 진짜이길 바랄 뿐이다. 그 친구 엄마는 나의 직장 동료로 무척 친한 사이다. 평소 부모님 이야기를 함께 하면서 뭘 자꾸 주시는 게 제일 싫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다. 내 옥수수도 그럴까봐 걱정을 하게 된다. 


1:1이 아닌 경우에는 그런 걱정 없이 나눔을 할 수 있다. 단톡방에 올려 지원자가 있으면 나눠주면 되니까. 공동육아를 같이 하는 가족들끼리 아이들 옷이나 장난감을 그렇게 공유한다. 정기적으로 어린이집이나 방과후교실에서 나눔장터를 열기 때문에 그곳에 가져가서 나눔을 하기도 한다.


문제는 개별적인 나눔이다. 내가 처음 여기 이사를 왔을 때 같은 공동육아를 하게 된 이웃이 손질한 생선을 가져다준 적이 있었다. 내 의사를 묻지 않고 가져오셨는데 되돌려 보낼 수가 없었다. 생선을 잘 먹지 않는 우리 식탁에 끝내 그 생선이 올라오지 못했다. 냉동실에 1년 넘게 묻혀 있다가 버려졌다. 생선에게도, 아니 물고기에게도 그 이웃에게도 미안한 일이지만 내가 그 생선들을 어떻게 했어야 했나 의문이다. 받지 말았어야 했나, 다시 누군가에게 넘겼어야 했나, 억지로라도 먹었어야 했나.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 길러서 나에게 주신 옥수수가, 내가 더운 여름날 삶은 옥수수가, 그런 식으로 취급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나눔을 받을 상대의 ‘눈치를 본다’는 건 나쁜 게 아니다. (표현이 조금 비굴하게 들릴 뿐) 받아서 즐거울 사람에게 갈 수 있도록 세심하게 살피면서 나눠줘야겠다. 서로를 배려하는 건 나눔에서도 꼭 필요한 덕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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