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는 가져가고 실패는 떠넘기는 조직문화가 만든 빌런
리더십의 본질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권한, 지위, 영향력을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진정한 리더십은 권한을 쥐는 것이 아니라, 그 권한이 만들어내는 결과와 책임을 감당하는 데 있다. 책임을 지는 순간 리더는 비로소 리더가 된다. 반대로 책임을 회피하는 순간, 리더십은 사라지고 권력만 남는다. 권력만 남은 리더는 쉽게 폭력으로 변질되며, 언어라는 도구마저도 상대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무너뜨리는 무기로 사용하게 된다.
내가 경험했던 한 상사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겉으로는 조직의 성과를 강조했지만, 실제로는 책임을 떠넘기고 언어를 통해 구성원을 통제하는 데 능숙했다. 표면적으로는 단호해 보였지만, 실상은 두려움과 회피가 가득한 리더였다. 그의 행동은 단순한 개인적 특성을 넘어, 조직의 문화를 심각하게 병들게 만들었다.
그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자리에 늘 서 있었지만, 실제로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추진하거나 중요한 전략적 선택을 앞두고도 언제나 “팀장 의견을 들어보자”, “실무자가 더 잘 알지 않느냐”라는 말로 책임을 미뤘다. 겉으로 보면 권한을 위임하는 듯 보였지만, 그것은 진정한 위임이 아니었다.
만약 결과가 성공적이라면, 그는 “내가 처음부터 그렇게 방향을 잡았다”라며 공을 가져갔다. 반대로 결과가 좋지 않으면 “왜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느냐”, “네가 책임지고 했던 거 아니냐”라며 해당 직원을 몰아붙였다. 결국 구성원들은 어떤 결정을 내려도 자신을 지켜줄 리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점점 더 방어적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조직에서 가장 위험한 신호는 성과의 문제가 아니다. 리더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것이다. 신뢰가 무너지면 팀원들은 스스로를 지키는 데 급급해지고, 새로운 시도를 회피하며, 최소한의 일만 수행하려 한다. 책임을 회피하는 리더는 바로 이 악순환을 만든다.
그의 또 다른 특징은 폭언이었다. 회의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제시되면 “이건 쓰레기다”, “개짓거리에 불과하다”, “멍청한 생각이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후배가 어렵게 준비한 보고서도 단 몇 마디 모욕으로 무너졌다. 그에게 언어는 토론의 도구가 아니라, 상대를 압도하고 침묵시키는 무기였다.
언어는 리더십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말 한마디는 구성원에게 방향성을 제시할 수도 있고, 에너지를 불어넣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말 한마디는 사람의 자존심을 짓밟고, 자신감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 리더가 던지는 부정적 언어는 개인을 넘어서 팀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결국 회의는 자유로운 의견 교환의 장이 아니라, 누가 또 공격당할까 눈치만 보는 자리로 변질되었다.
책임을 회피하고 언어로 지배하는 리더는 단순히 불편한 상사가 아니다. 그는 조직에 치명적인 상흔을 남긴다.
첫째, 불신의 문화가 자리 잡는다. 팀원들은 리더를 신뢰하지 못하고, 동료조차 믿지 못한다. 언제든 책임이 자신에게 전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침묵의 문화가 확산된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나오지 않고, 창의적 시도는 사라진다. 왜냐하면 의견을 내는 순간 조롱당하거나 책임을 떠안게 되기 때문이다.
셋째, 회피의 문화가 뿌리내린다. 모두가 적극적 도전 대신 최소한의 생존을 택한다. 책임을 지는 사람은 바보가 되고, 침묵하는 사람이 안전하게 살아남는다.
이 세 가지는 곧 조직을 정체와 후퇴로 몰아간다. 단기적으로는 리더가 권력을 유지하는 듯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인재가 이탈하고 성과가 무너진다.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은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반복되는 실패나 통제 불가능한 상황을 경험한 사람은 결국 어떤 노력을 해도 소용없다고 믿게 된다는 이론이다.
이 상사와 함께한 팀원들의 모습이 바로 그랬다. 처음에는 억울함과 분노로 반응했다. “왜 내가 이런 모욕을 당해야 하나”라는 저항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저항은 줄어들고, 대신 체념이 자리를 잡았다. “어차피 말해봤자 욕만 먹는다”, “어차피 내가 책임지게 된다”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팀원들은 더 이상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학습된 무기력은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조직 전체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구성원들은 자율적으로 생각하거나 도전하지 않으며, 결국 조직은 껍데기만 남는다.
이 사례가 던지는 교훈은 분명하다. 책임 없는 권력은 폭력이다. 리더가 권한만 쥐고 책임을 지지 않으면, 그 권력은 조직을 보호하는 힘이 아니라 파괴하는 힘이 된다. 또한 폭언은 단순한 말실수가 아니다. 그것은 구성원의 자존심을 꺾고, 조직의 심리를 붕괴시키는 무기이다.
리더십은 권한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권한이 만들어내는 무게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언어는 상대를 억누르는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을 세우고 성장시키는 도구이다. 이 상사가 보여준 모습은 우리가 절대로 닮아서는 안 될 리더의 모습이며, 동시에 진정한 리더십이 무엇인지 되묻게 하는 반면교사이다.
책임을 회피하는 리더와 언어로 지배하는 리더는 당장은 권위를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조직을 병들게 한다. 그들의 행동은 인재를 떠나게 만들고, 남아 있는 사람들을 침묵하게 만들며, 조직의 미래를 가로막는다. 따라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지금 책임을 지고 있는가, 아니면 피하고 있는가?” “나는 언어를 무기로 쓰고 있는가, 아니면 사람을 세우는 도구로 쓰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순간, 누구든 빌런이 될 수 있다.
리더십은 화려한 전략이나 거창한 비전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작은 결정과 사소한 언어에서 시작된다. 결정을 피하지 않고 감당하는 용기, 언어를 절제하여 사람을 세우는 성숙함, 이 두 가지가 리더십의 핵심이다.
책임을 회피하고 언어로 지배하는 리더는 결국 자신이 세운 조직을 무너뜨린다. 그러나 책임을 지고 언어로 사람을 살리는 리더는 자신과 조직 모두를 성장시킨다. 두 리더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처럼 보이지만, 그 결과는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