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이팝나무 20240507
‘함박눈이라도 내린 거야’
오월이 되자 어느덧 이팝나무가 꽃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눈송이처럼 하얗게 물들었습니다. 여름이 시작할 무렵 하얀 꽃을 피우는 이팝나무는 철을 잊은 듯합니다. 사월 하순이 되자 흰 꽃눈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더니만 여름의 냄새를 맡은 듯 햇살처럼 번졌습니다.
이팝나무를 본 것은 불과 십여 년 전입니다. 새로 만들어진 도시의 대로변에 어린나무들이 가로수로 심어졌습니다. 나무의 이름도 모르면서 저 연약한 나무가 언제 자라 구실을 할까 했습니다. 다음 해 꽃이 피고 나서야 눈과 마음이 갔습니다.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을 때입니다. 햇살을 받자, 벚꽃보다 더 화려하게 길을 밝힙니다. 쌀을 닮은 꽃 모양을 보면서 어릴 때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춘궁기 밥이 눈에 선하던 시절입니다.
나는 조팝나무를 보며 자랐습니다. 이팝나무의 꽃이 쌀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듯 조팝나무도 좁쌀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나무에까지 이런 이름을 붙였을까? 지난날의 우리나라 경제 사정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춘궁기 또는 보릿고개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얼마나 우리의 삶이 어려웠으면 5·16 쿠데타 공약 중에 이런 구절이 들어있었겠습니까. 공약 4항입니다.
‘절망(絶望)과 기아선상(飢餓線上)에서 허덕이는 민생고(民生苦)를 시급(時急)이 해결(解決)하고, 국가(國家) 자주(自主) 경제재건(經濟再建)에 총력(總力)을 경주(傾注)한다.’
삶의 질은 우선 먹고사는 문제에 달려있습니다.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다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혁명 이후 우리나라는 경제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국가의 독려 속에 온 국민이 발 벗고 나서야 했습니다. 우리는 화끈한 민족입니다. 하면 된다는 신념 속에 모두가 새마을 운동의 기치 아래 근면 자조 자립을 목표로 동분서주했습니다. 이 결과 독일이 말하는 ‘나일강의 기적’이라는 말처럼 우리도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냈습니다. 결과 최빈국에서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습니다. 원조에 의존하던 나라의 형편에서 남의 나라 국민을 도울 수 있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세계의 역사를 살펴볼 때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려서 이팝나무를 보지 못한 이유가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남부지방에서 자생하는 나무로 여겼는데 기후 변화로 인천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나무가 됐습니다. 하얀 꽃이 오래가고 병충해에도 강합니다. 내 고장에 심어진 가로수는 오래되지 않아 아직도 가냘픈 몸매입니다. 남쪽의 나무를 알아보니 전북 진안에 3백여 년이나 된 나무가 있습니다. 꽃이 화려하지만, 자태도 웅장합니다. 천연기념물이라고 합니다.
늘 내 눈에 보이는 이팝나무 그 모습으로 길을 지키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몇 해마다 한 번은 몸살을 앓는 가로수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뭉텅 잘려 나가는 가지에 몸통이 망부석처럼 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차의 통행과 전깃줄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몸의 대부분을 잃었습니다. 느티나무, 플라타너스, 은행나무 등입니다. 나는 이팝나무에 말합니다.
‘너무 크지 않게 자라라, 특히 가지를 너무 펼치지 마라. 너도 잘릴라.’
이팝나무가 꽃 무더기를 이룰 때면 어릴 때 먹던 쑥버무리를 떠올립니다. 잎과 꽃이 뒤엉킨 게 꼭 버무리를 연상케 하기 때문입니다. 쓴맛과 단맛이 어우러진 쑥버무리, 나는 아직도 그 맛을 잊지 못합니다. 도시에서 자란 아내는 입맛에 맞지 않아서일까요. 가끔 타령을 하지만 별 반응이 없습니다. 한때 내 말에 마음을 두었는지 시골에 가서 함께 쑥을 뜯어왔습니다. 시장에 가서 삼베 보자기를 사고 내 말에 따라 쑥버무리를 쪘습니다. 몇 차례를 반복한 이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냉장고에는 아직도 두 덩이의 데친 쑥이 있습니다. 쑥 뜯으러 갈까 하고 슬며시 묻습니다.
“아직 많이 남았는데.”
이팝나무의 꽃이 활짝 피어 하늘을 가리는데 쑥버무리를 언제 할지 모릅니다. 소래 어시장이라도 가야 할까 봅니다. 도다리쑥국이라도 끓이자고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