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산촌의 소리 20241031

by 지금은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날에는 낙엽을 밟으러 갑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좋습니다.


'발소리일까 , 낙엽소리일까?'


그동안의 의문이 풀렸다.


'합작품이지 뭐'


오늘은 낙엽을 밟지 않기로 했습니다. 나뭇잎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올해의 여름 기온은 유난히 사람의 마음을 괴롭혔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생물들이라면 같은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예년에 비해 불볕더위가 심했습니다. 높은 기온도 문제지만 그 지속 기간이 상상외로 길었습니다. 10월이 돼도 열기는 식을 줄을 몰랐습니다. 열대야가 지속되는 날이 퍽 길었습니다. 기상대의 말을 들어보니 한 달이 넘었습니다. 기상관측이래 최장의 기록입니다.


올해는 나뭇잎이 단풍 들까? 이대로라면 일 년 내내 열대지방처럼 계절에 관계없이 푸르름을 간직하지 않을까 하는 심정입니다. 지나친 더위는 생물들의 활기를 빼앗았습니다. 나무나 풀이나 하나같이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것은 과일나무입니다. 채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무더위는 이들의 수확량을 감소시켰습니다. 발육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채소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과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과일을 염려하는 사람 중에는 사과가 십여 년 후에는 우리 땅에서 사라질지 모른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배추도 마찬가지랍니다. 내가 좋아하는 채소와 과일 중의 하나인데, 이런 말을 들으니 잠시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나는 어린 시절 산촌에서 살았습니다. 환경이 그러하니 산과 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틈이 나면 산골짜기나 등성이로 쏘다녔습니다. 이곳이 우리들의 놀이터나 마찬가지입니다. 가을이면 사촌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대추, 밤, 감, 다래, 으름......


올해는 산에 가본 일이 없습니다. 햇수를 세어보니 몇 년이 지났다는 생각이 듭니다. 젊은 시절과는 달리 나이를 먹어가며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지 남들의 이야기에도 외면을 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마음속 발길은 늘 고향의 산천을 쏘다닙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되지 못해 한동안 집에서 빈둥거리며 지냈습니다. 몸이 약한 나는 집안의 일을 제대로 거들지 못하고 그저 잔심부름이나 하는 정도에 머물렀습니다. 가난한 집안 사정은 늘 식량에 관해 모든 마음을 쏟아부어야 했습니다. 농사를 부지런히 지어도 늘 춘궁기는 물로 눈이 쌓이는 겨울부터 걱정을 해야 했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해내야 할 일이 있지만 겨울은 먹거리를 걱정하는 것에 비해 일손은 남아돌았습니다. 지금처럼 비닐하우스 농사를 할 수도 없는 시절이고 보니 먹을 것을 마련하기 위해 딱히 할 일은 없었습니다.


어느 늦은 가을날입니다. 삼촌이 시내에 다녀오더니 무슨 말을 들었는지 다음날부터 산으로 향했습니다.


"약초를 캐면 식량에 보탬이 될 것 같아."


한약방에 들렸던 모양입니다. 산행을 마치고 돌아온 삼촌은 혼자 다니기에는 심심하기도 하고 다소 위험하니 함께 가보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이날부터 눈이 쌓이지 않는 겨울까지, 그리고 눈이 사라진 봄까지 산을 헤맸습니다.


'낙엽 밟은 소리, 낙엽 구르는 소리'


낙엽의 소리는 늘 다르게 내 귀를 스칩니다. 낙엽의 양에 따라, 낙엽의 마른 정도에 따라, 바람에 따라, 내 발길이 닿는 무게나 속도에 따라, 삼촌과 내가 함께 딛는 순간에 따라 다양한 색깔의 소리와 높낮이다 달라졌습니다. 그때는 약초를 찾아야 한다는 마음뿐이어서 그냥 지나치고 말았지만 지금은 그때의 내 모습은 물론 주변의 상황을 하나둘씩 짚어가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한 편의 영화를 그린다면 어떨까요. 슬라이드 필름처럼 나타났다 조각조각 이어지기도 합니다. 침엽수의 낙엽이 쌓인 곳, 활엽수의 낙엽이 쌓인 곳, 혼재해 있는 곳, 그 양에 따라, 산비탈의 기울기에 따라 나타나는 효과음은 제각기 다른 소리를 달고 옵니다.


한 번은 산등성이에 올랐을 때입니다. 무언가 앞으로 다가옵니다. 어쩌다 보니 삼촌과는 나는 골짜기를 두고 떨어졌습니다. 약초를 찾아 헤매다 보면 서로 떨어진 줄을 모를 때가 있습니다. 삼촌이려니 했는데 무시무시한 검은 물체가 앞을 다가섭니다. 멈칫했던 몸을 돌려 산 아래로 줄달음질 쳤습니다. 무릎까지 덮인 참나무 숲을 마구 달렸습니다. 낙엽을 헤치며 달렸다고 해야 할까, 바스락거리는 낙엽의 소리가 내 귀를 울렸습니다. 아니 산골짜기를 덮었습니다. 밑으로 내려오기까지 몇 차례 뒹굴었습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습니다. 이불 위, 스펀치 위, 한겨울의 눈 위, 그것도 아니면 바다의 갯벌, 한숨 돌리고 나뭇가지에 스쳐 긁힌 손과 얼굴을 제외하고는 멀쩡했습니다.


다시 산을 기어오릅니다. 어깨에 지니고 다니는 망태기와 호미가 사라졌습니다. 어느 곳에 떨어져 있을지 모를 물건을 찾기 위해 거슬러 오릅니다. 밟히는 낙엽의 소리가 조금 전까지와는 완연히 다릅니다. 소리의 강도가 낮고 빠르기가 느립니다. 아래도 오르는 발걸음은 느리고 더딜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평생학습관에 행사가 있다기에 집을 나섰습니다. 강의는 없지만 그동안 수강생들이 만든 작품과 각각의 재능을 발하는 날입니다. 내가 참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는 마음입니다. 네거리의 신호등 가까이 다가갈 때 잔 바람이 불었습니다. 공중에서 느티나무의 단풍 진 낙엽이 살랑거립니다. 하나둘씩 몇 개가 시차를 두고 바닥을 향합니다. 고운 빛깔이 눈에 들어오자 재빨리 다가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하지만 나를 외면이라도 하려는 듯 손을 스쳐 바닥에 내렸습니다. 다시 손을 뻗쳤습니다. 하지만 때마다 낙엽은 나의 굼뜬 동작을 비웃듯 일렁거리는 몸짓으로 피했습니다. 초록불이 켜진 횡단보도를 건너야겠습니다. 행사시간이 다가옵니다. 감질나게 떨어지는 낙엽을 기다릴 수 없습니다. 마음속으로 낙엽을 잡는 연습을 하며 발걸음을 옮깁니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날에는 손에 잡히겠지요. 10월의 마지막 밤에 곱게 물든 낙엽을 떠올려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