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낙엽과의 이야기 20241118
해님의 눈썹이 움찔하더니만 눈동자가 뿌옇게 흐려졌습니다.숨죽여 떨어뜨리는 작은 방울들이 곱게 물든 단풍잎을 무겁게 만듭니다. 한낮부터 시작된 비는 잠자리에 들 때까지도 그 모습 그대로 내리고 있습니다. 창가를 스치듯 내리는 가는 빗방울이 순간적으로 전등의 불빛에 들어올 때는 깨알만큼 작은 수정알이 됩니다. 눈 깜짝할 사이보다 더 빠르게 반짝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잠시 밖을 내다보는 동안에도 바람소리가 귓전을 울립니다.
'내일은 기온이 곤두박질친다는데 바람까지 불어서야.'
찬기를 느끼지는 못하지만 생각만으로도 몸이 부르르 떨립니다. 지난해의 학습 효과인지 모릅니다. 첫추위에 얼면 겨울 내내 간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동안 계절의 날씨답지 않게 기온이 높았습니다. 초겨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닌데 한낮의 걸음걸이에는 따끈함이 매달리곤 했습니다. 이상 기후 탓이라고 합니다.
새벽잠에서 깨어나자 패딩옷을 걸쳤습니다. 어제의 일기예보를 보니 10도 이상의 기온차가 있다기에 추울 것이라는 예감을 했습니다. 어둠이 걷힌 공원은 어제와는 달리 맑음입니다. 밤새 안녕하셨느냐는 말처럼 바깥의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바람은 아직도 어제처럼 거칠게 느껴집니다. 아니 기다렸다는 듯 내 품으로 달려듭니다. 앞에 보이는 나무의 가지가 휑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사이에 고운 잎을 무작정 떨구더니만 이 새벽에는 헤아릴 수 있을 만큼의 단풍잎을 달고 있습니다. 이 나무는 며칠이나 잎을 달고 있을까. 갑자기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가 떠오릅니다. 이 나무를 보면서 병석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마지막 잎새를 떨구지 않도록 무슨 조치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늘 새벽이면 하던 대로 놀이터 옆 공간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나무밑에 숨겨둔 공을 꺼냈습니다. 자연스레 발길이 공에 접촉됩니다. 공이 내 발끝을 떠나 앞에 보이는 벽에 부딪칩니다. 바람이 모아 온 낙엽 위를 공이 미끄럼을 타듯 굴러갑니다. '탁' 소리와 함께 벽에 부딪쳐 힘없이 낙엽 위에 멈춥니다. 어제와는 달리 낙엽은 공을 무서워하지 않나 봅니다. 소리도 내지 않고 요동도 치지 않습니다.
'공이 바닥에 쓸려 가며 벽에 부딪쳐 돌아오는 동안 낙엽은 날 살려라 하는 듯 소리를 내며 흩어지곤 했습니다. 쌓인 낙엽을 가로지르는 동안의 상태입니다. '사각, 살그락' 하는 소리와 함께 모여있던 낙엽이 나비의 무거운 몸짓처럼 옆으로 흩어졌습니다. 밭에 씨를 뿌리듯 흩어져 제각기 뒹굴던 낙엽들이 지금은 여기저기에 무더기를 이루었습니다. 바람에 쓸려 이리저리 날리던 것들이 빗방울의 무게에 눌려 자유롭지 못한 몸이 되었나 봅니다. 세찬 바람이 불어도 공이 이들의 몸을 힘차게 건드려도 미동뿐입니다. 장소를 옮겨갈 힘이 없나 봅니다.
는개처럼 내린 비에 몸이 젖었지만 고운 빛깔은 간직하고 있습니다. 나뭇가지에 붙어있을 때와 별반 다름이 없습니다.
'나 낙엽이라고 우습게 여기지 마. 아직은 단풍잎만큼 고운 얼굴이야.'
우습게 보거나 얕잡아 볼 생각은 없습니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예쁘다 하는 느낌을 품었습니다. 나뭇가지에 제각기 매달려 아름다움을 뽐낼 때와는 달리 새로움을 선사합니다. 무더기를 이룬 낙엽들의 자태는 또 다른 시선을 갖게 합니다. 각각의 아름다움을 살피는 재미도 있지만, 한 무더기의 아름다움을 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한 송이의 꽃, 한 아름의 꽃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마음이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내 시선은 상황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색깔, 많고 적음, 상태, 장소 등에 따라 느끼는 감정은 제각각입니다.
오늘의 낙엽, 비에 젖어 눅눅한 채로 나뭇가지에서 지니던 제 빛깔과 상태의 모습, 그리고 무거움.
어제의 낙엽, 햇빛에 바람에 색깔이 옅어지고 오그라진 모습, 그리고 가벼움. 물체에 부딪치거나 바람에 의해 반응하는 소리.
나는 한바탕 공과 낙엽과 율동적인 시간을 보낸 후, 낙엽의 한 무더기 앞에 쪼그려 앉았습니다. 단풍잎, 은행잎, 느티나뭇잎, 벚나무잎, 모과나뭇잎 등을 하나하나 헤아려봅니다. 제각기 다른 색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 나뭇가지를 떠났냐에도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잎이라도 마름과 오그라듬의 정도, 퇴색의 상황에 따라 상태의 변화를 보입니다.
벚나무의 낙엽에 손이 갑니다. 감춰진 잎들 사이로 곱게 보입니다. 집어드는 순간 깊은 상처를 발견했습니다. 잎의 가운데가 뻥 뚫려있습니다.
'아깝다, 집안에 가을을 거둬들이고 싶었는데'
잎을 눈에 대고 주위를 둘러봅니다. 상처의 구멍으로 생각지 못한 색다른 풍경들이 겹겹이 다가옵니다. 틀에 박힌 삼각형구도, 사각형구도, 원형구도는 마음에 없습니다.
'아무렇게나 짜인 구도',
오라! 자연미가 있군요. 낙엽 몇 장을 집안으로 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