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 첫눈 오는 날 20231113
첫눈이 내렸다고요? 우리 고장이 아닙니다. 어제 제주도 산간에 눈이 내렸답니다. 영하의 날씨에 흰 눈이 소복이 쌓였습니다. 가지마다 눈꽃이 피었습니다. 인천은 눈발이라고는 눈을 부릅뜨고도 보지 못했는데 저 남쪽에 눈이 먼저 내렸다니 뭐 이런 일이 있을까 하면서도 그 풍경이 처음 보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해마다 보는 눈이 특별한 것도 없지만 ‘첫’이라는 말에는 귀가 솔깃합니다.
그러나 ‘첫’이라는 글자가 입에 맴도는 순간 나도 모르게 의미를 부여합니다.
‘새해의 첫날, 첫사랑, 첫 만남, 첫서리, 첫…….’
중학교 때입니다. 첫눈이 내리는 날, 서울 남산 꼭대기에서 만나자고 굳게 약속했습니다. 한두 사람도 아니고 반 전체입니다. 60년 후에 만나자고 했으니 퍽 긴 세월입니다. 성인이 된 후 어느 날 문득 만남이 생각났습니다. 몇 학년 때더라, 약속한 사람들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지만 전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메모라도 해둘 걸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마저도 늦은 일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기록은 제2의 두뇌라고 하지만, 3학년 때라 해도 버스는 이미 떠났습니다.
오늘은 우리 고장에도 첫눈이 내렸습니다. 제주도에 비하면 일주일이나 늦었습니다. 위도상으로 보면 중부지방이 북쪽에 자리 잡고 있지만, 기온의 차이는 자로 낸 듯 일정하지 않습니다. 겨울로 접어드는데 며칠 전보다 오늘의 기온이 더 높은 경우가 있습니다. 첫눈치고는 기세가 대단했습니다. 아침을 먹고 잠시 책을 보고 있는데 밖이 갑자기 어두워지는 느낌입니다. 슬며시 일어나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습니다. 안개가 밀려오듯 밀가루가 바람에 흩날리듯 바람이 눈을 공중에 뿌려댑니다. 점차 하늘이 어두워지고 함박눈으로 변했습니다. 펄펄 내리는 눈은 바람을 타고 높은 건물 사이를 헤치며 날갯짓합니다.
작년 첫눈은 보잘것없었습니다. 보일 듯 말 듯했습니다. 감질난다고 해야 할까요. 목이 타는데 이슬방울 하나 입에 흘려 넣는 기분이었습니다. 볼일을 마치고 전철역을 나섰는데 반짝이는 눈발을 보고 느릿느릿 발을 옮겼습니다. 눈을 맞아보고 눈사람도 만들고 싶었습니다. 웬걸요, 눈은 햇살에 밀려 곧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눈 오리를 만들고 싶어 도구를 가지고 나왔던 아이나 나나 허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꼬마의 마음이 더 허무했겠지요.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갈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올해는 왠지 움직이고 싶은 생각이 줄었습니다. 나이 먹은 티를 내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아이만큼이나 첫눈을 기다렸는데 눈다운 눈을 보면서도 멍청하게 밖만 내다볼 뿐입니다.
“웬일이래요. 강아지만큼 뛰던 양반이.”
“마음이 무거워요. 철이 들었나 봐.”
아내가 피식 웃었습니다. 무거워진 마음에 비해 몸은 가벼워졌을까요.
눈이 내리는 어느 날 공원에 나갔습니다.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눈 오리를 만드는 게 부러웠습니다. 집게로 눈을 뭉쳐 펼치면 오리가 한 마리씩 태어납니다. 언덕바지에 나란히 놓인 모습이 멋져 보였습니다.
이듬해 동대문 완구 거리에 갔습니다. 10월경입니다. 빨리 눈 오리 집게를 사고 싶었습니다. 부풀었던 마음이 풍선 바람 빠지듯 했습니다. 가게를 일일이 찾아다녔지만, 손에 넣을 수 없었습니다. 12월 초는 되어야 선을 보일 거랍니다. 때를 기다려 사야겠다는 마음으로 집을 향했지만, 그 후로 잊고 지냈습니다. 미리 사두어야 했는데, 신발장을 열었습니다. 얼레가 보입니다. 오늘 같은 날에는 연을 날리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를 게 분명합니다. 한 타래나 되는 줄을 다 풀어도 모자랄 만큼 높이 뜰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포기해야겠습니다. 작년에 끊겨 없어진 연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봄에는 아래층에 사는 사람이 눈썰매를 준다는 것을 사양했습니다. 받아놓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입니다. 잿빛 하늘이 서서히 밝아집니다. 펑펑 쏟아지던 눈이 곧 잦아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나비가 날 듯 너울거립니다. 곧 그마저도 사라졌습니다.
‘아차’ 깜빡했습니다. 화분을 들여놓아야 합니다. 한 달 전 해충이 발견되자 밖에 내놓고 약을 뿌렸습니다. 생각처럼 빨리 사라지지 않습니다. 실하지 못한 잎을 모두 따버렸습니다. 새순을 키울 생각이었습니다. 화분을 살펴보니 건강을 회복하는 모습입니다. 어제저녁 비닐을 씌워놓길 잘했습니다. 유리창에 매직으로 눈사람이라도 그릴까요. 첫눈과 함께 겨울이 시작됩니다.
나는 아직도 겨울 아이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