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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23

334. 겨울 소리 20231230

by 지금은

눈이 내립니다. 오랜만에 펑펑 쏟아집니다. 짙은 잿빛 하늘은 오로지 눈송이만 품었습니다. 꽁꽁 닫힌 유리벽은 무성 영화의 필름처럼 눈발이 세찬 모습만 보여줍니다. 대신 화장실에서 바람소리가 납니다. 외부와 내부의 공기 흐름 때문입니다. 강제 순환을 하고 있습니다. 바깥바람이 심하면 자연스레 실내의 공기 흐름도 빨라지나 봅니다.

도시의 겨울 소리에는 별 게 있습니까. 자연의 소리치고는 초라합니다. 눈 내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고 가끔 바람소리뿐입니다. 자동차 경적소리가 납니다. 자연의 소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닥이 미끄러우니 서로 조심하자는 것인지 상대방 때문에 놀랐다는 것인지 모릅니다. 도시는 눈이 내려도 마음을 끌만한 흥취가 없습니다.

겨울 소리에 관심이 있다면 뭐니 뭐니 해도 시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골의 소리란 자연 그대로의 음이 실려 있습니다. 떠나 온 지 오래되어 내 어릴 때 향수가 그대로 남아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살아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눈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산골짜기의 동네는 적막에 쌓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도회지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소리가 숨 쉬고 있습니다.

가장 조용한 소리는 한 밤중 찾아오는 손님입니다. 들릴 듯 말 듯 온통 귀를 쫑긋하고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드디어 잘그락 사그락 눈이 내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어쩌다 우두둑 큰 소나무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도 들립니다.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윙윙 눈보라 소리도 들립니다. 사립문을 흔들고 방문을 들썩이기도 합니다. 바늘구멍으로 황소바람이 들어온다고 하더니만 문풍지가 피리 소리를 내며 바르르 떱니다. 밖으로 내놓았던 얼굴을 이불속으로 감춥니다. 놀란 부엉이의 울음이 그쳤습니다.

새벽입니다. 할머니의 기침소리가 들리더니 부엌에서 가랑잎과 솔잎 타는 소리가 들립니다. 잠결에 오줌이 마렵습니다. 밖으로 나왔습니다.

“더 자지 않고.”

할머니의 말씀이 없어도 더 자야 합니다. 슬그머니 방 안으로 들어와 할머니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등이 따스해집니다. 잠시 잠이 들었나 봅니다. 등이 따스하다 못해 따갑다는 느낌이 듭니다. 방문 틈 사이로 물 끓는 소리가 들립니다. 가마솥에서 쇠죽 끓는 소리입니다. 증기기관차에서 내뿜는 수증기처럼 김을 내뿜고 있습니다. 가득 부풀어 빠져나가야 할 수증기가 좁은 틈을 비집고 내는 소리입니다. 장작이 이글거리며 소리를 합세합니다. 송진이 불에 타며 기운을 더합니다. 불기가 고래를 타고 세차게 방구들 속을 파고듭니다. 굴뚝에서 기관차의 연통으로 수증기를 내뿜듯 흰 연기를 지붕 위로 올립니다.

아침을 먹고 나면 새벽에 다 치우지 못한 눈 치우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빗자루 질 소리, 고무래로 눈을 미는 소리, 삽질하는 소리. 이어 이 집 저 집 장작을 패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햇살이 비칩니다. 지붕 위의 눈이 서서히 녹아내립니다. 밤새 얼어 길이와 부피를 키운 고드름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똑 똑 눈물이 추녀 밑에 떨어지며 동심원을 그립니다. 잠시 후입니다. 햇살에 온기가 도는 듯했는데 ‘우두둑’ 소리와 함께 고드름이 추녀 밑을 향해 곤두박질합니다. 눈이 치워진 맨바닥에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지붕을 타고 내리는 눈물은 아랑곳하지 않고 똑 똑 그리던 동심원을 멈추지 않습니다. 바닥이 동그랗게 파였습니다. 밖으로 찰방찰방 물을 튀겨냅니다. 동그란 물방울이 생겨났다 톡 꺼지기도 합니다.

점심때이니 이제는 그만 소리를 멈춰야겠지요. 아닙니다. 아이들의 소리가 들립니다. 식사를 일찍 끝낸 이웃의 소리입니다.

“썰매 타러 가자.”

남자 어른들의 소리도 들립니다.

“나무하러 가세.”

눈밭을 뛰는 발자국 소리, 눈 위를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앞산에, 뒷산에 나무 찍는 소리, 나무 자르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나무를 지게에 옮겨 싣습니다.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마에 땀이 맺혔습니다. 뛰노는 아이들의 이마에도 땀이 맺혔습니다. 바람을 가르는 썰매의 소리가 들립니다. 팽이가 웁니다.

노란 해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마당을 물들이더니 지붕 위에 앉았습니다. 잠시 뒷산에 걸렸습니다. 주춤주춤 산 너머로 미끄러졌습니다. 청솔가지가 사랑방 아궁이로 들어갑니다. 꾸역꾸역 시뻘건 불속으로 들어갑니다. ‘지지직 뚝뚝’ 허연 물기를 내뿜으며 이글이글 불기가 구들 속으로 파고듭니다. 송진 타는 냄새가 납니다. 새벽의 아침처럼 솥에서 같은 소리를 토해냅니다. 수증기를 뿜어댑니다.

저녁을 먹고 나면 동네사람들이 우리 집 사랑방으로 찾아옵니다. 밤이 이슥하도록 짚단을 두드리는 소리, 새끼 꼬는 소리, 가마니 짜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우리 삼촌의 「장화홍련전」 「전우치전」 「심청전」 등의 이야기 읽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멀리 달빛 속으로 어젯밤처럼 늦은 부엉이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잘하면 날갯짓 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눈이 내리는 앞산을 바라봅니다. 희미한 시야로 고향의 모습이 보이는 듯합니다. 그 옛날 고향의 겨울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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