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내 앞에 단풍 20221023
도서관에 들렀습니다. 나오면서 아내에게 전화했습니다.
“왜요.”
“공원의 도서관 길이 너무나 고와요. 지금 아들과 산책하면 좋겠는데.”
쉬는 날이니 방 안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을 아들을 밖으로 불러낼 마음에서 아름답다는 말을 강조했습니다.
그냥 두었다가는 하루 종일 방 안에서 갇혀 지낼 것 같습니다. 나도 함께하고 싶었지만, 책 한 권을 가방에 넣고 서울로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친구들과의 모임 약속 때문입니다.
오늘따라 날씨가 좋으니, 공원의 가로수 길은 단풍 그 자체로 동화 속 세상입니다. 느티나무를 비롯한 단풍나무들이 고운 자태를 하늘에 마음껏 드러냈습니다. 작은 바람 속에 나뭇잎들이 수줍게 춤을 춥니다. 하나둘씩 가지를 떠나 너울거리며 땅으로 내려앉습니다. 나는 나무들에 눈을 팔며 도서관에 이르는 길을 기분 좋게 걸었습니다.
‘이 좋은 날에 썰렁한 전철역 앞의 빌딩에서 만나자고 할 게 뭐람.’
전달에 함께 고궁에 가기로 했는데 무슨 연유인지 만남을 다음 달로 미루었습니다. 나는 미리부터 고궁 탐방을 점찍어 두고 강조하자 그들도 흔쾌히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전달에 사정이 있어서 모이지 못했으니 이번 달에 고궁을 갔으면 했습니다. 창덕궁을 추천했습니다. 창경궁과 함께 비원이 있어 산책하기에 좋은 장소입니다. 그곳도 단풍이 시작됐을 겁니다. 총무가 나에게 연락을 한 것은 그저께입니다. 역전 빌딩이라는 말에 모임 장소를 변경하자고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그만한 사정이 있을 거라고 하고 말았습니다.
책 한 권을 들고 전철에 올랐습니다. 평상시와는 달리 경로석은 자리가 비었습니다. 오가는 동안 계속 자리에 앉아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따라 환승의 시간이 단축되었습니다. 역에 도착하니 약속 시간보다 이십여 분이나 여유가 있습니다. 개찰구를 빠져나갈까 하다가 승강장의 의자에 앉기로 했습니다. 다 읽지 못한 제목의 내용을 마저 읽어야겠습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책을 읽기에 알맞은 장소를 발견했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쪽으로 작은 공간이 있고 혼자만 앉을 수 있는 돌의자가 보입니다. 내용의 끝을 읽었을 때 남은 시간은 오 분 남짓입니다.
역전의 가로수도 단풍을 보입니다. 하지만 초라합니다. 몸집이 작으려니와 매연에 시달렸기 때문인지 잎사귀들이 생기를 잃었습니다. 모임이 있을 때 바라보는 나무들은 봄이나 여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름시름 중병을 앓고 있는 모습입니다.
오늘은 수다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랜만에 만나서일까. 여인네들 못지않습니다. 가을철이고 보니 주로 농사나 동물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 친구는 동물 이야기에 집중했습니다. 오소리, 너구리, 족제비, 고라니의 습성과 먹이에 대해 나를 보며 말했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또 다른 친구는 열매에 대해 말합니다. 으름, 다래, 블루베리, 호도, 은행 등입니다. 그의 말도 들어주어야 합니다. 다음 친구는 가을걷이에 대해 말합니다. 며칠 전 된서리가 내렸답니다. 벼 벨 시기가 되어 조금만 있으면 벌판이 횡 할 것 같다며 서운한 표정을 짓습니다. 황금벌판을 계속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가장자리에 앉은 친구는 나무 이야기를 합니다. 요즈음 산에 간벌하느라 바쁘다고 했습니다. 분재 이야기도 하며 한동안 단풍 속에 살 게 됐다고 말합니다.
‘이를 어쩌지요.’
별말이 없는 나를 상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냅니다. 조금 전에는 배가 고프다고 했는데 배가 고픈 게 아니라, 말이 고팠나 봅니다. 밥보다 말이 더 맛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식사 시간이 늦어집니다.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야 합니다. 부지런히 눈 맞춤을 해야 합니다. 추임새도 넣어야 합니다. 어쩌다 보니 하고 싶은 말은 하나도 하지 못했습니다. 말할 기회를 주지 않으니 섭섭하게 느껴지겠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말을 듣는 재미가 있습니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밖으로 나오자, 한 친구가 말합니다.
“우리 집 큰 화분에 불에 덴 나무가 있는데 가보지 않을래?”
“죽은 나무를 봐서 뭐 하게.”
“그게 아니고 너무 빨개서.”
시간이 늦다 보니 다음으로 미루었습니다. 역에서 내리자, 공원의 도서관 길을 지나 집으로 옵니다. 단풍잎들이 떨어져 바닥에 흩어집니다. 많은 사람이 길을 따라 걷습니다. 석양도 이들의 등을 따라옵니다. 나뭇잎들이 저녁노을에 퐁당 빠졌습니다. 나도 퐁당 빠져 단풍 터널에 갇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