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그림일기 20210807
어느 농부의 일기가 책으로 나왔습니다. 아직 모르고 있었습니다. 발행 연도를 보니 2016년입니다. 짤막짤막한 글입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동안 책이 서 있는 자리를 수없이 지나쳤습니다. 눈에 익은 책이었지만 선 듯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잠시 망설이다가 손에 넣었습니다.
집에 와서 천천히 훑어보니 한두 면의 글이 있고 일부분을 차지하는 삽화가 글에 힘을 실어줍니다. 그림이 간략하여 마음에 와닿습니다. 간단한 만화를 그리듯 했지만 내 마음을 얻을 만합니다. 책을 넘길 때마다 내가 살았던 어릴 적 모습들이 박혀 있고 삶의 도구들이 줄지어 나옵니다. 도구뿐만이 아닙니다. 시골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동식물도 들어있습니다. 상사화, 능소화, 토종닭, 오소리…….
나는 시골의 삶에서 벗어 난 지 오래됐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도시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한때는 시골의 삶이 그리워 아내를 졸라봤지만, 도시의 생활에 익숙했기 때문인지 고개를 외면했습니다. 도시를 떠나서의 삶은 너무 어려울 거랍니다. 몸이 아파도 병원 가기가 힘들 거랍니다. 시골에 살아보지 않았으면서도 어떻게 잘 아느냐고 했더니만 몰라서 묻느냐고 합니다. 시골 사람들의 이야기도 듣고, 텔레비전을 봐서 안다고 합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시골의 생활은 그 지방 사람들도 힘들지만, 우리 같이 몸에 배지 않은 사람은 더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시골의 생산 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전원생활을 한다면 모르겠으나 그 또한 어렵습니다. 아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토박이들과의 교류가 생각같이 쉽지 않다고 합니다. 사교성이 풍부해서 그들의 삶 속에 스며들어 함께 잘 어울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사람이 어려움을 겪는 모양입니다.
옛날부터 있었던 일입니다. 타향살이는 힘들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시골 사람들도 도시 생활이 마음같이 쉽지는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시골 생활이 힘들지만 잘 적응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나처럼 시골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지냈습니다. 객지에 나가 생활을 하다가 고향을 찾았습니다. 이장의 직책까지 갖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 분명합니다. 믿음이 있기까지는 어려움이 많았다고 여겨집니다. 글의 내용을 봅니다. 꾸밈이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를 단문 형식으로 써내갔습니다. 삽화 또한 그렇습니다. 간단하게 핵심만을 표현했습니다. 그림에 소질이 있는 듯싶습니다. 책을 읽는 순간순간 틈을 내어 흉내를 내보았습니다. 멍 때리듯 삽화를 따라 그렸습니다. 몇 분의 사이에 그 사람의 손을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내가 아는 그림들입니다. 군데군데 시골의 정겨움이 묻어나옵니다.
책 읽기가 점점 느려집니다.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일기를 읽다 보니 생각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동심이지요. 내가 그릴 수 있는 것은 초등학교 때까지의 그림일 수밖에 없습니다. 열두 살의 학령기에 상상력에 멈춰버렸습니다. 어쩌다 고향을 찾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그 모습은 껍데기일 뿐입니다. 모습이 많이 변했습니다. 이제는 시골이라고 하기에 모든 것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도시라고 말하기에도 더더욱 어울리지 않습니다.
요즘 고향을 떠올릴 때면 내 유년 시절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이고 보면 욕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지은이는 삼백여 페이지가 되는 공백을 충실히 메웠습니다. 여백의 미도 살렸습니다. 삽화가 페이지마다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내가 어려서 보아왔던 친근한 모습들이 눈을 아른거리게 만듭니다. 지게 위에 실린 똥장군, 사랑방 아궁이 앞에 기다리는 풍로, 숯다리미, 침을 묻혀가며 쓰던 몽당연필, 게으른 놈이 짐을 많이 진다는 아버지의 말씀, 콩나물시루를 받치려고 자귀질 해서 만든 체 다리…….
책 읽기가 점점 더뎌집니다. 읽기보다 상상하는 시간이 더 길어집니다. 아무래도 일주일은 걸릴 듯싶습니다. 추억이 몽글몽글, 뭐 더 늦어지면 어때. 눈을 뜨고 있어도 감은 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