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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 오늘 같은 날이면 20240109

by 지금은

눈이 내립니다. 잠시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더니만 고운 가루로 변했습니다. 바람이 없는 것을 보면 금방 그치지 않을 예감이 듭니다. 화롯가에 앉았습니다. 인두로 화롯불을 뒤적입니다.


“불은 왜 까부르는 거야.”


고모의 말에 말없이 하던 짓을 멈추었습니다. 대신 인두로 흩어진 재를 끌어모아 불을 덮었습니다. 고운 재를 덮고 있어야 불기가 오래갑니다. 공기의 흐름이 닿는 면을 적게 하여 시간을 끌 수 있습니다. 그 대신 온기의 정도는 덜합니다.


부엌으로 갔던 고모가 삼발이와 뚝배기를 들고 왔습니다. 슬그머니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고모가 부젓가락으로 화롯불을 헤칩니다. 삼발이를 꽂았습니다. 원 안으로 빨간 불꽃이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뚝배기를 올렸습니다. 점심때 먹을 찌개를 끓일 준비입니다. 청국장 끓는 냄새가 방 안을 채우고 부엌의 밥이 뜸 들 때면 문지방을 넘어 밥 냄새를 불러올 것입니다.


마루의 연탄난로 위에서 주전자의 물이 끓고 있습니다. 며칠 전 산에서 꺾어온 진달래 꽃망울이 활짝 열렸습니다. 유리문 밖으로 쌓인 눈이 붉음을 더 강조합니다.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일어섰습니다. 창밖으로 눈이 갑니다.


‘눈이 언제 멈출 거야’


대답이 없습니다. 컵에 커피를 한 술 담습니다. 프림을 두 술 담습니다. 설탕을 세 술 넣었습니다. 주전자를 들었습니다. 끓던 소리가 멈췄습니다. 주전자를 기울였습니다. ‘픽’ 소리와 함께 물과 수증기가 컵 속을 향합니다.

어제 뉴스에 아침 출근 시간부터 수도권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많은 눈이 내릴 거라고 하더니만 정말입니다. 작정했습니다. 오늘은 꼼짝하지 않고 집에만 있겠다고 걱정하는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동안은 비가 와도 나가고, 바람이 불어도 나가고, 추워도 나가고, 눈이 와도 문밖으로 나갔습니다. 하루에 한 번은 바깥바람을 쏘여야 합니다. 하다못해 아파트 앞 정류장이라도 슬며시 보고 와야 직성이 풀립니다.


눈이 내립니다. 창밖을 수시로 내다봅니다. 내리는 눈이 내 눈에 들기려도 하려는 듯 때마다 마주칩니다. 바닥에 쌓인 눈은 모른 척 움직임이 없습니다. 몸을 부풀릴 뿐입니다. 정류장 앞으로 차가 지나갑니다. 승용차가 지나가고 택시가 지나가고 버스가 지나갑니다. 사람도 오갑니다. 인도와 차도가 완전히 구분되었습니다.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았는데도 차도는 검은색, 인도는 흰색입니다. 요즘의 정치판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어느 색이 진보이고 보수인지는 모르겠으나 양자의 대결 같습니다. 그들은 흑백의 논리로 무장했습니다.


며칠 전 정치인을 상대로 테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전에도 여러 차례 있던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테러를 저지른 범인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이러쿵저러쿵 말합니다. 한 마디로 테러는 나쁘다는 뜻입니다. 나도 동의하지만, 뒷맛은 찝찝합니다. 누가 이런 행동을 하게 만들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과격한 행동이, 입에 담지 못할 말이 국민의 마음에 불을 질렀습니다. 혐오스러운 정치판이 국민을 불안 속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막말하게 만들었고 두 주먹을 불끈 쥐게 했습니다. 정치인이 국민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국민이 정치인을 걱정하는 꼴입니다.


창밖을 내다봅니다. 눈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는 듯 오지 않는 모습이지만 분명 하늘에서 나풀거립니다. 좀이 쑤십니다. 꼼짝하지 않겠다던 마음이 사라지는 순간입니다. 고양이의 발걸음으로 현관문을 밀었습니다. 집 앞 50여 미터 거리의 찻집으로 향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온기뿐입니다. 넓은 공간에 나를 맞이하는 것이라고는 여러 개의 탁자와 의자입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아파트 주민을 위한 무료 공간입니다. 무인기에서 커피를 한 잔 뽑았습니다. 키오스크를 익힌 게 다행입니다.

의자에 앉아 따스한 커피를 두 손을 감쌌습니다. 처음으로 이 텅 빈 곳을 홀로 차지했습니다. 나만의 장소가 되는 순간입니다. 사방이 트인 유리벽을 향해 눈을 돌립니다. 먼저 찾아온 눈은 바닥을 덮고 지금 내리는 눈은 내 눈과 눈 맞춤을 하고, 이어 내릴 눈은 나를 모른 척할 거고, 밤에 내리는 눈은 내가 모른 척할 거고…….

커피 잔의 뚜껑을 열었습니다. 겨울의 입맛은 뜨거워야지, 요즘 젊은이들은 이 날씨에도 ‘얼죽아’라지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곧 얼어 죽어도 ‘찬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랍니다. 투명 컵 속에 얼음덩이가 담겨있습니다. 빨대도 꽂혀있습니다. ‘겨울은 겨울다워야지’ 점심시간이 끝나가나 봅니다. 몇몇 사람의 손에 ‘얼죽아’가 들려있습니다. 보는 순간 몸이 오싹해집니다. 재빨리 내 아메리카노를 입술로 가져갑니다. 입 주위에 온기가 피어납니다. 아무래도 겨울은 따스한 맛이지, 팔팔 끓는 청국장, 한술, 두 술, 세술 커피믹스, 뜨거운 아메리카노. 군고구마 하나쯤 덧붙이면……


오늘 같은 날에 괜히 정치가 이야기를 비쳐서 분위기를 흐릴 게 뭐람,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정치가는 정치가다워야지.’ 아직도 눈이 내립니다. 눈이 노래를 감상하며 실컷 눈 생각이나 해야 할까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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