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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Grace Nov 26. 2024

설렘이라는 것

반갑지 않아.

모순이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때 나는 계산적인 사람을 싫어한다고 말한다.

사랑에 있어서도 계산이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그것은 사랑이 아닐 수 있다 속단하며 단언한다.

그러나 부끄러운 것은 지극히 계산적인 인간이 바로 나이다. 누구를 만날 때, 누구에게 마음을 줄 때, 가장 철저히 계산을 하게 된다. 그 사람의 경제적인 상황 혹은 여유를 따지는 것은 아니라도, 이 사람이 지금껏 어떤 사랑과 만남을 하였는지, 이 사람을 만나면서 내가 느끼는 압박감 혹은 스트레스와 내가 받는 사랑과 즐거움을 저울질한다. 바꿀 수 없는 것이 과거이지만, 그 과거의 크기가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한 크기인지 저울질한다. 당연히 나도 그다지 깨끗하고 순결한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울질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반증이 아닐까 잠시 헛웃음 치며 생각하게 된다.


그러던 중 진부한 표현이지만 누군가가 나의 시선에 들어오고, 누군가가 나의 마음에 들어온다면_계산이 끝나지 않은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사고"라고 표현한다_ 나는 지독하리만치 눈이 멀어버린다. 그림을 그려도, 음악을 듣거나 만들어도, 글을 적어도, 나의 모든 창작에는 그 사람이 녹아내린다. 문장 하나, 선곡 하나, 그림의 선 하나에도 그 사람이 스며들게 된다. 이 어찌나 비효율적인가! 단지 마음의 작용 하나로 인해서 그토록 이성적인 척했던 나는 지극히 감성적으로 변한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 누군가에게 설렘을 느낀다는 것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에만 온 신경을 쏟아도 모자란데, 그 신경이 분산되며 나의 하루의 대부분이 그 사람으로 차오르는 이 비효율을 감내하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


아! 나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인가. 그토록 많은 사랑의 상처를 겪었음에도 다시 그 안으로 풍덩 빠지는 나는 어쩔 수 없는 불쌍한 남자인가. 아직 그 상처들이 다 아물었는지도 확인하지 못했는데. 아직 나의 상처 위에 다른 상처를 새길만큼 강해지지 않았는데 다시금 사랑 안으로 풍덩 빠진다. 알몸으로 가시나무 숲을 향해 걷는다. 가장 초라하고 가장 솔직한 모습으로 다시 하나의 상처를, 하나가 아닐 수도 있는 상처를 새기러 자진해서 발걸음을 옮긴다. 지나온 삶의 흔적이 나의 몸에 악취로 남아 있을지라도, "이거면 되겠지." 자위하며 독한 향수를 나의 몸 구석구석에 뿌린다. 결이 그다지 다르지 않은 악취일지라도, 삶의 악취보다는 나으리라 자위하며 독한 담배 연기로 나의 몸을 덮는다. 다시 기르려 결심했던 수염을 면도한다. 지저분한 머리를 깔끔히 만진다.

나를 완벽히 가릴 수는 없으나, 그대 앞에 섰을 때 덜 초라해 보이지 않을까 하며 나를 가린다.


사랑은, 설렘은 나의 감각을 뒤섞는다. 그대의 아픈 말 한마디가 나에게는 달콤하게 느껴진다. 하늘은 어느새 색이 바뀌어 적색과 녹색이 뒤섞인 오묘한 색으로 나의 눈을 비춘다. 바닥이 차고, 공기가 차가워 겨울 외투를 입고 있었던 나의 여섯 평 작은 방 안은 따스한 감정으로 몽글몽글해져 외투를 벗게 한다. 이전에는 간지러워 듣지 않았던 음악이 들린다. 여유롭지 않은 지갑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대를 만나기 위하여 좋은 곳을 예약하고, 선물을 하나 산다. 시간이 다 되었다. 조금 있으면 그대가 나타난다. 나의 삶을 다시 한번 망가뜨리기 위하여 그대가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하나,

둘,

셋.


그대가 저 문을 열고 나타난다. 밝게 웃으며, 마음 어딘가에는 날카로운 무엇인가를 숨기고 그대가 나에게 걸어온다. 파멸이리라, 이 만남 뒤에는 나의 마음은 고장나리라. 몇 개월 혹은 수년을 나는 고통받으리라. 그러니 어서 오길. 그러니 내게 웃으며 다가오길. 지금 그대와의 만남의 값을, 그대의 미소의 값을, 설렘의 값을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파멸과 고통으로 나는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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