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서 12라는 숫자를 들으면 어딘가 모르게, 완성, 모든 것을 의미하는 기분이 듭니다. 피아노에서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을 합쳐 한 옥타브 안에('도'에서 높은 '도'사이) 모두 12개의 음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12개의 장조 조성과 12개의 단조 조성 곡이 태어날 수 있죠. 바흐의 평균율곡집을 보면, 장조 12곡 + 단조 12곡, 이렇게 24개 곡이 세트를 이룹니다.
음악사에서 바로크 시대에는 협주곡 12개가 한 세트로 출판되곤 했습니다. 왜, 소설책도, 길이가 짧은 단편 소설은 책 한 권에 여러 작품이 실리곤 하잖아요. 단편집처럼요. 바로크 시대 협주곡이 그랬습니다. 작품번호 하나에 길이가 짧은 협주곡이 보통 여섯(6)곡 씩, 많게는 열두(12)곡까지 한 책에 실렸어요. 그땐 협주곡 한 곡이 10분 가량으로 무척 짧았거든요. 우리가 사랑하는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도 열두 곡 한 세트에 들어있습니다. 비발디는 <화성과 창의의 시도>라는 제목으로 악보집 오푸스 8번(작품번호 8번)을 출판하면서, 열두 개 협주곡을 한 책에 넣었어요. 그중 첫 번째부터 네 번째 곡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이고, 사계보다 덜 유명한 여덟 곡이 뒤에 이어집니다.
한 해를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12라는 숫자는, '온전함'과 가까운 기분이 들게 해줍니다. 1년 열두 달을 음악으로 담은 작품을 들을 때 그 느낌이 더 진해지는데요, 엄친아였던 멘델스존의 누나 파니 멘델스존 헨젤은, 남편과 이탈리아로 떠났던 긴 여행을 추억하며... 피아노 모음곡 <다스 야르(그 해)>를 작곡했습니다. 파니는 사랑하는 남편에게 이 곡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냈고, 궁정 화가이던 남편 헨젤은 아내의 악보에 직접 삽화를 그려서 다시 선물했다고 합니다.
차이콥스키는 연재하듯, 일년 열두 달에 관한 음악을 음악 잡지에 실었어요. 차이콥스키의 모음곡 <사계 the seasons> op. 37b입니다. 1875년 말,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잡지 발행인 니콜라이 베르나르드는 모스크바에 있는 차이콥스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가 발행하는 음악 잡지 <누벨리스트>에 싣기 위해서, 매월 한 곡씩, 계절의 분위기가 담긴 피아노 곡을 써달라는 거였습니다. 각 월에 어울리는 러시아 시인의 시와 함께,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곡 악보로 발표하는 것이었죠. 그는 흔쾌히 요청을 수락했고, 다음해 1월과 2월에 발표할 곡을 즉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1876년 1월부터 12월까지,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모음곡 <사계>가 음악 잡지 <누벨리스트>에 실렸습니다. 이후에 열두 곡은 하나의 모음곡으로 묶였어요.
이 곡이 완성된 1876년은, 차이콥스키가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모스크바에 정착한 지 10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모스크바에서 좋은 음악 동료들과 예술가들을 만나 인맥을 넓혔고, 작곡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죠. 그의 작품은 곧장 초연과 출판으로 이어지고, 여러 도시에서연주되면서주목받기 시작한 때입니다. 차이콥스키는 그 해에 <슬라브 행진곡>, 발레 <백조의 호수> 같은 곡도 완성됐는데, 아마도 대작을 쓰던 틈틈이, <사계>를 썼을 거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달마다 바뀌는 계절의 정경과 사람들의 모습이 훌륭한 영감이 됐습니다. 1월 난롯가에서, 2월 카니발, 3월 종달새의 노래, 4월 아네모네, 5월 별이 빛나는 밤, 6월 뱃노래, 7월 농부의 노래, 8월 추수, 9월 사냥, 10월 가을 노래, 11월 삼두마차, 12월 크리스마스.. 이렇게 열두 개의 장면이 그의 피아노 모음곡에 담겼어요.
러시아는 어느 지역보다도 겨울이 길고 매서운 곳인데요, 이 작품에 그려진 겨울은 그보다는, 따뜻한 느낌이에요. 12월, 크리스마스 날 저녁 아이들이 점을 치며 노는 풍습이나, 1월에는, 불길이 사그라지며 새벽이 밝아오는 난롯가의 장면이 그려집니다. 창 밖에 찾아온 계절을, 시와 피아노 음악, 예술 작품과 더불어 누린 19세기의 러시아 사람들처럼,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통해 우리의 열두 달을 음미해봅니다.
카티아 부니아티쉬빌리가 숲 속에서 연주한 이 곡 영상이 유튜브에 있었는데 지금은 보이질 않네요. 10월이면 꼭 듣는 곡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