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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Oct 18. 2023

숫자 18: 열여덟 번째 변주가 곡을 대표한다.

라흐마니노프 <파가니니 주제 랩소디>

펜에 날개가 돋은 듯, 손에 모터가 달린 듯, 일필휘지,

거침없이 써나간 작품이 있습니다.

라흐마니노프에겐 <파가니니 주제 랩소디>가 그랬어요.

연주시간 20분이 넘는 피아노 협주곡 편성의 작품을 단 5주 만에 완성했습니다.      


사실, 곡의 재료가 좋았습니다.

1820년에 발표된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카프리스> 마지막 곡으로,

출판 이후 100년이 넘도록 큰 사랑을 받은 선율이었죠.

슈만, 리스트, 브람스가 이 주제로 피아노곡을 썼고,  

피아니스트였던 라흐마니노프 역시 이들의 곡을 즐겨 쳤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피아노 협주곡 편성으로 곡을 쓴 겁니다.     

  

라흐마니노프는,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으로 어지러운 고향을 떠난 뒤,

유럽의 전쟁을 목격했고, 다시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재즈와 신낭만, 새로운 음체계가 격돌하는 미국의 20세기 음악 상황에서,

처음에는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나중에는 작곡가로 자신을 알리며 치열하게 살았죠.

예순 즈음부터는, 유럽에서 활동을 늘렸는데,

1930년대 초부터 여름이면 스위스 루체른 호숫가의 ‘빌라 세나르(SeNaR)’에서

한적한 삶을 누리며 작곡에 몰두했습니다.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 랩소디>는 1934년, 이곳에서 지낸 여름 5주 동안에 완성됐어요.

주제와 스물네 개 변주로 구성되며, 앞부분제10변주까지는 빠르고 기교적입니다.  

제11변주부터 가장 유명한 열여덟 번째 변주까지 다소 느린 변주가 중간 부분이 되고, 이어서 다시 빠르고 힘찬 변주가 이어지며 제24변주를 끝으로 곡을 맺습니다.

정리하면... 빠르고, 느리고, 빠른..., 3악장 피아노 협주곡과 닮았네요.

    

이 곡에서 주제만큼이나 유명한 부분이, 열여덟 번째 변주입니다.

“느리게, 노래하듯이(안단테 칸타빌레)”라는 지시어가 달려, 감미롭고 유려한 음악을 펼쳐내는데요,  

기억에 남을 만큼 아름다운 부분이지만, 정작 작곡가는 다소 수학적인 계산으로 이 부분을 썼다고 하네요.

조성을 단조에서 장조로 바꾸고,  원곡의 선율에서 올라가는 건 내려가게, 내려가는 건 올라가도록.. 진행 방향을 거꾸로 해서 만든 선율입니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이 '그저 기획사를 위해 쓴 곡'이라고 무심히 말하면서도,

열여덟 번째 변주만큼은, 거듭 자랑할 정도로 좋아했죠.

가장 진심은, 그가 남긴 이 한 마디에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이 열여덟 번째 변주가, 곡 전체를 대표한다."


16분 20초부터 제18변주가 시작됩니다!!!!


그의 말이 맞습니다. 이 열여덟 번째 변주가 이 곡을 대표합니다. 변주곡에서는 주제가 온전히 드러나는 변주가 유명하고 알려지기 마련인데, 주제를 반전시킨 형태의 선율이 이렇게 인기를 끌다니요! 역시, 라흐마니노프, 역시 주제 선율을 쓴 파가니니입니다.

열여덟 번째 변주가 나오는 곳을 찾아보니까요, 영화 <사랑의 은하수>에서는 중요한 장면마다 이 음악이 흘렀고, 드라마, 광고에서도 꼭 이 변주가 등장하네요. 공유가 선전하는 정수기 광고마저 너무나 로맨틱하고 청량해지고 맙니다.


열여덟 번째 변주가 배경음악으로 쓰인, 정수기 광고. 음악도, 화면도, 모델도 청량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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