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말문이 막히는 경우가 자주 생긴다. '친구'라는 카테고리에 속해 있는 '우리'들은 서로 통하는 게 있고,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내적인 친밀감을 얻으며 보이지 않는 관계를 만들게 된다. 친구란 나의 가치관 속으로 아무런 저항도, 허울도 없이 냉큼 다가와준 존재이며, 나에게 '친구'라는 호칭으로 곁에 있는 저 사람 역시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자라온 환경이 다른 '우리'가 과연 모든 것이 다 일치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친구'란, 나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울타리 안에 그 사람을 가둬놓는 것이라 생각한다. 얼핏 생각하면 굉장히 잔인하고 폭력적인 표현이지만, 인간은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며 양보할 줄 아는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배려를 통해 그 울타리의 허들을 낮추게 된다. 그렇게 허들이 낮아진 자신의 우타리를, 그 친구가 편안하게 넘나들게 함으로써 나와 상대방에 대한 원활한 관계가 이어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만일, 어느 한쪽이 그 허들을 낮추지 못하고 상대방의 가슴팍까지 높여버린다면, 상대방은 그 울타리를 넘어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게 되면서 마음이 흔들리게 될 것이다.
"왜 그렇게 반응이 뚱해?"
"왜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해?"
"친구가 뭘 그렇게 깐깐하니?"
나에게만큼은 헌신적이고 절대적으로 지지해 줄 것이라는 안일한 착각, 내가 너를 알기에 우리는 서로 통한다는 착각. 가장 편하고 친하기에 배려가 무뎌지는 친구라는 관계는 결코 영원하지 못한다.
상대방이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생각된다면, 내가 상대방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지를 먼저 고민해 보면 좋겠다. 단순하게 앉을자리를 먼저 양보해 주는 것도, 오랜만에 만났을 때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고민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도, 상대방을 위해 선뜻 손 내밀어줄 수 있는 사람인지를 생각했으면 좋겠다. 내가 만들어 놓은 울타리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도록 상대방을 배려하고 인정해 주는 마음이 지속되어야만 '친구'라는 관계는 이어질 수 있다.
그러니, '내가 너를 안다는 착각'에 너무 사로잡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너'를 안다면, '너' 역시 '나'를 알고 있을 테니, 부디, 서로가 서로에게 사로잡히지 않는 편안한 관계가 유지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