草(초)와 록(綠)이 여럿 모이면 초록초록한 자연의 모습이 된다. 초록이 생명과 번영을 상징하는 이유다.
초록은 프랭크 바움의 동화 <<오즈의 마법사>>에서는 착한 사람들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도로시가 마법사 오즈를 만나기 위해서 찾아간 에메랄드 성은 모든 것이 초록빛이다. 심지어 이 성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은 초록색 안경을 써야 한다. 이는 이 성의 지배자인 마법사 오즈가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꾸민 정치적 속임수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오즈의 덕분으로 자신들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안정과 평화를 누리며 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모든 것이 초록색인 에메랄드 성은 자연의 모습으로 위장한 마법의 세상이며, 초록색 안경은, 지배자가 보여주는 위장된 평화를 상징한다. 이 동화에서 도로시의 고향인 캔자스는 빛을 잃은 회색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도로시가 불시착한 마법의 공간은 모든 것이 초록빛이다. 영화나 뮤지컬에서 도로시가 부르는 'over the rainbow'의 가사처럼, 초록색은 무지개 저쪽 어딘가에 존재하는 꿈이자, 그 꿈이 언젠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젊은 사람들의 희망을 상징한다.
초록색을 뜻하는 草(초)는 艹(풀 초)와 早(일찍 조)가 합해진 글자이다. 지평선 아래에서 막 솟아오른 이른 아침의 태양처럼, 이제 막 솟아난 새싹(艹)을 뜻한다. 초벌로 쓴 글을 의미하는 초고(草稿)나 초안(草案)에 그 뜻이 담겼다. 후에 색을 가리키는 마땅한 글자가 없어 새싹(草)의 색을 빌려 '초록색'을 뜻하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綠(푸를 녹)은 구리가 산화되어 생기는 푸른색 녹(rust)을 가리킨다. 그 구성요소인 彔(나무새길 록)은 '녹'을 뜻하는 발음요소이자, 금속에 녹이 슬어 표면이 벗겨지는(彔-나무 깎다 -껍질이 벗겨지다) 모습을 뜻한다.
동녹(銅綠)과 벌레 먹은 나뭇잎
우리말에서 '녹'은 주로 '시들어 죽어가다'를 뜻하는 동사 '슬다'와 결합하여 한 단어처럼 쓴다. 이와 마찬가지로 '녹(綠)'을 의미하는 고대 히브리어 '헬라'는 '병이 들다, 벗기다'를 뜻하는 '할라'에서 유래되었다.
이는 '녹(綠)'과 '병(病)'을 동일시한 한 것으로, 녹슨 금속과, 벌레 먹은 나뭇잎의 유사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렇듯 '벗기다'와 '녹'은 그 뿌리가 같다. 그래서 '벗기다'를 뜻하는 彔(나무새길 록)을 구성요소로 삼았다. 여기에 糸(실 사)를 더해, 비단을 물들이는 푸른색을 뜻했다.
물에 불린 녹두를 갈아 그 앙금을 말린 가루를 녹말(綠末)이라 하고, 초여름 푸른 잎을 스치는 바람을 녹풍(綠風), 신록이 우거진 시기에 내리는 비를 녹우(綠雨)라 하며, 녹색을 띤 해초(파랑말)를 녹조(綠藻), 눈의 압력이 비정상으로 높아 시신경이 녹슬듯이 손상되는 눈병을 녹내장(綠內障)이라 한다.
한편 碌(푸른 돌 록)은 녹색(彔)을 띠고 있는 구리 광석(石)을 뜻한다. 이 광물은 무늬가 공작의 꼬리깃털 같아서 공작석으로도 불린다.
오시리스
고대 이집트인들은 공작석(Malachite)에서 추출한 안료를 초록색으로 사용했다. 고대 이집트 사회에서 초록색은 생명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상징한다. 이집트 신화에 등장하는 오시리스(죽은 자를 다시 깨우는 부활의 신이자 초목의 신이다)의 얼굴을 초록색으로 칠한 것도 그 때문이다. 오시리스의 모티브는 겨울에 죽었다가 봄에 소생하는 초록색 식물이다.
초록색은 자연의 색이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부분의 아시아권 사람들은 초록색을 선호한다.
그런데 고대 중세 유렵에서는 한 때 녹색이 금기시되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순수를 최상의 가치로 여겼다. 특히 연금술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물질을 섞어서 사용하는 것은 순수성을 해치는 행위로 받아들였다. 이는 물감도 마찬가지였다. 천연 녹색은 파란색과 노란색을 섞어서 만든다. 때문에 중세 미술에서는 초록색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르네상스 초기까지 지속되었다.
만약 혼색의 금지가 계속되었다면 우리는 모나리자 같은 예술품을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산화되어 색깔이 바랬지만 모나리자가 입고 있는 옷은 원래 초록색이었다.
초록색은 자연의 색이지만 정작 초록 식물에서 천연색을 얻지는 못한다. 초록식물에서 채취한 염료는 발색이 좋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검게 변색된다. 그래서 푸른색에 노랑을 섞어 초록색을 내게 되는데, 그 과정이 복잡하고 비용도 많이 들어, 고대에는 초록색으로 물들인 비단은 부자들이나 입을 수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은 스웨덴의 과학자 빌헬름 셀렌이다. 그는 1775년 화학물질을 실험하다가 우연히 초록색 물질을 발견했는데, 가공하기도 쉽고 변색도 잘 되지 않았다. 그는 이 안료를 자신의 이름을 따서 '셀레그린'이라고 불렀다. 이 안료는 곧 모네 등 당대 유명 화가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이후 대중화되어 그림뿐만 아니라 벽지나 음식에 사용하는 색소 등 일상생활에서도 사용되었다.
그런데 제조사들이 큰 수익을 내고 있을 즈음에 심각한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셀레그린 가루를 흡입한 한 소녀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조사결과 셀레그린에 들어있는 비소가 원인이었다. 비소는 예로부터 사람을 독살하는 데 사용한 치명적인 독극물이다. 하지만 셀레그린 제조업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 사실을 감추었고, 피해자가 속출하는데도 그들의 증언을 묵살하고 반박하며 계속 판매를 이어 나갔다.
셀레그린 피해자 중의 한 사람이 나폴레옹이라는 설이 있다. 2008년 이탈리아의 한 연구소는 나폴레옹의 머리카락에서 현대인들의 평균치보다 약 100배가 넘는 양의 비소를 발견했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집을 에메랄드 성으로 만들고 싶었는지, 자신의 집을 온통 셀레그린으로 칠했다고 한다.
한 때 사람들로부터 '침묵의 살인자'란 오명을 쓴 초록색은 이후 과학의 발전으로 거듭나 지금은 건강과 희망을 상징하는 자연색으로 인식되고 있다.
한편 綠(푸를 녹)의 구성요소인 彔(나무새길 록)은 원래 두레박을 그렸다.
彔(갑골문) 금문
갑골문을 보면, 윗부분은 지지대에 고정시킨 도르래, 중간은 두레박, 그 아래 작은 점들은 두레박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이다. 그 쓰임새를 살펴보자.
淥(밭을 록)은 염색재료 등의 액체(水)를 두레박(彔)에 담아 채에 붓고 있는 모습이다. 마찬가지로 菉(조개풀 록)은 조개풀에서 채취한 염료를 두레박으로 퍼서 채에 거르는 모습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두레박(彔)이 '새기다(錄)' 또는 '벗기다(剝)란 뜻을 가지게 된 것일까?
이는 성서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우물(Abrnham's Well)이 그 유래를 간직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우물은 이삭, 야곱과 같은 성경의 중요 인물들과 관련이 있으며, 아브라함과 그 가족들이 하나님을 만나 은총과 축복을 받았던 곳이다. 이 우물은 지금 현재 이스라엘 남부 브엘세바에 위치하고 있다.
고고학자 로빈슨(Robonson)이 발굴한 아브라함 시대의 우물
아브라함의 '우물'을 히브리어로 '브에르'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자연적이든, 사람이 판 우물이든 간에
'구덩이' 그 자체를 가리키는데, 이 단어는 금속이나 석판에 '기록하다, 선언하다'를 뜻하는 '바아르'에서 유래되었다. 이를 우리말로 바꾸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말 '우물'의 본딧말은 '움물'이다. 움에서 솟아나는 물이라는 뜻이다. 이 우물의 움에서 '파다'라는 뜻이 나왔고 이로부터 의미가 확대되어 '새기다, 기록하다'라는 뜻이 나왔다.
한편 彔(록)은 '원래, 근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강의 근원으로서 산기슭에서 용출하는 자연 속의 우물(原)을 가리킨다.
결국 彔(록)은 그 원형인 두레박에서 '퍼내다'란 뜻이 나왔고, 그 짝꿍인 우물에서 '파다'라는 뜻이 나왔는데, 이로부터 '벗기다, 새기다, 기록하다, 근본'등의 뜻이 나왔다. 예를 들면,
錄(기록할 록)은 금속(金)의 표면을 파서(彔) 글자를 새긴다는 뜻이며, 剝(벗길 박)은 나무껍질이나 짐승의 표피를 칼로 벗긴다는 뜻이다. 속을 퍼내거나 파내는 도구를 彔(록)이라 하면, 겉을 깎거나 벗기는 도구를 刀(도)라 할 수 있다. 이 두 도구의 속성을 형상화한 것이 <<주역>>의 산지박(山地剝) 괘이다. 산과 땅이 파이고 깎여서 무너진다는 뜻이다.
한편 고대 사회에서 마르지 않는 우물은 신의 축복으로 여겼다. 그래서 우물을 관장하는 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그 모습을 그린 것이 祿(복 록)이다. 글자의 형태는 우물(彔) 앞에 제단을(示)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모습이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우물은 충청남도 논산 연무읍 마전리(麻田里)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우물이다. 이 우물 안에서 솟대처럼 생긴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풍작을 비는 제사 때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외에도 우물제사에는 주술적인 의미로 오염을 막고 정화의 힘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방패, 투구, 보습 등을 제물로 삼아 우물에 빠뜨리기도 했다.
우물의 둥근 테두리는 공동체의 상징이다. 더군다나 샘물은 자연이 원래 주인으로, 목마른 자에게 기꺼이 내어주는 자연의 선물이다. 그럼에도 우물의 동그라미를 아주 작게 그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장자는 '우물 안 개구리'라 했는데, 그리스 신화는 목마른 나그네를 박대하다가 벌을 받아 개구리가 된 사람들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