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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렉시테리언 Sep 29. 2021

“왜 제일 맛있는 반찬을 안 가져오셨어요?”

점심 약속이 없던 어느 날, 혼자 조용히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느지막이 구내식당에 내려갔다. TV 뉴스를 보며 여유롭게 식사를 하는데 장관님이 비서실 직원들과 함께 구내식당에 들어오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혼자 먹고 있다고 내 자리로 오시지는 않겠지?’


식판에 얼굴을 박고, 남은 음식을 먹고 있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같이 앉아도 될까요?” 

장관님이었다. 그 유명한 강경화 장관님이 내 앞에 서서 함께 식사를 해도 괜찮겠냐고 묻고 계셨다.


군 생활 10년의 버릇은 어디 가지 않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밥으로 반쯤 가득한 입으로 웅얼거리며 말했다.


“네!!!” 


소탈한 장관님은 까마득한 실무직원인 나를 편하게 대해주셨다. ‘어느 부서에서 근무하는지? 요즘 주요 업무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내 이야기를 들으며 식사를 이어가던 장관님은 오늘 반찬(새콤달콤한 미트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이 너무 맛있다며 흥겨워하시고는 나에게 물었다.


“어머. 한진 씨는 왜 제일 맛있는 반찬을 안 가져오셨어요?”

“아 네. 저는 육식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요? 대단하네요. 저는 몇 번 하다가 매번 실패했는데.”

“사실 제가 힘든 것보다, 사회생활하면서 저 때문에 남들이 곤란해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날도 그랬다. 비 육식을 결정한 이후 처음으로 고기를 먹었던 날. 속이 많이 안 좋았던 날. 


서부 사하라 임무단의 팀 사이트(Teamsite)들은 각각 담당하고 있는 지역 내 모로코 또는 폴리사리오(POLISARIO) 군과 매달 연락 회의(Liaison Meeting)를 갖는다. 하루는 연락회의를 마치고 모로코군 지휘관으로부터 만찬 초대를 받았다. 모로코군 지휘관은 우리 군의 준장(원 스타 ★) 급이었다.


시간에 맞춰 팀 사이트 동료들과 지휘관 관저로 향했다. 만찬에 동석한 모로코 대령들과 응접실에서 인사를 나누고 간단한 다과와 차를 즐긴 뒤 만찬장으로 향했다. 기다란 방 양옆으로 소파가 놓여 있고, 가운데 테이블에 음식이 하나 둘 차려지고 있었다. 비록 육식을 하지는 않지만, 보통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한두 가지는 있기 마련이었기 때문에 메뉴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나는 여기에서 두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첫 번째 실수는 바로 그들이 고기를 무척이나 사랑한다는(Meat Lover) 사실을 망각한 것이었다. 본격적인 만찬이 시작되자 갖가지 고기 요리들이 끊임없이 차려졌고,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별로 없었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 두지 않기만을 바라며, 빵과 감자 같은 채소 위주의 조용히 식사를 이어갔다. 내 은밀한 편식은 안타깝게도 오래가지 못했고, 관찰력 좋은 모로코 대령에게 걸리고 말았다.


“한 대위, 채식주의자인가요?”

“아 네. 그렇습니다. 괜찮습니다. 빵도 있고, 제가 먹을 수 있는 것들만 먹으면 됩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모로코 지휘관이 정색하며 부하들을 질책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손님 대접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몰랐던 것, 그것이 내 두 번째 실수였다. 아는 아랍어라고는 “인샬라(신의 뜻대로)”와 “함 두릴라(감사합니다.)” 밖에 없지만, 얼핏 봐도 손님의 식성을 미리 챙기지 못한 부하들을 질책하는 것 같았다. 


“샐러드!”


일장 질책 뒤 지휘관이 한 마디 외쳤고, 음식을 준비한 부하가 어쩔 줄 몰라하며 황급히 주방으로 달려갔다.


“지휘관님, 아닙니다. 먹을 것이 충분히 많습니다. 괜찮습니다.” 


당황한 나는 모로코 지휘관을 말려봤지만, 지휘관은 단호했다.


“한 대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샐러드!!”


분위기가 갑자기 싸늘해지자, 팀 사이트에서 함께 온 옵서버(Observer) 한 명이 다급히 복화술로 말을 걸어왔다.


“진! 진! 고기 한 조각만 접시에 담아와. 한 조각만 담아. 한 조각만!”


상황을 얼른 마무리 짓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다급히 닭고기 요리 한 조각을 내 접시에 담으며 말했다. 


“지휘관님, 지휘관님! 아 네네! 치킨 한 조각 먹겠습니다. 네네! 치킨 담습니다.” 


모로코 지휘관의 표정이 조금 풀렸고 모두들 만찬을 이어 갔다. 잠시 후 샐러드가 나오자 모로코 지휘관은 제일 먼저 나에게 전달했다. 


풍성한 샐러드 덕에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이 충분했지만, 모로코 장교들의 시선이 내 접시에 집중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담아 온 닭고기를 실제로 먹는지 지켜보고 있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닭고기를 조금씩 찢어 먹기 시작했다. 


내가 닭고기를 먹는 것을 본 모로코 지휘관은 그제야 밝게 웃으며, 내 접시에 다른 고기 한 덩어리를 덜어주었다.


“자아~! 하나 먹었으니, 다른 것도 괜찮겠지요?”


그 뒤에도 다른 한 덩어리 또 한 덩어리... 결국 무슨 고기인지도 모르는 고기들로 배를 가득 채우고서야 만찬이 끝났다. 육식과의 이별을 선택한 이래 가장 많은 고기를 먹은 날이었다.


팀 사이트에 돌아와 만찬 일화를 이야기하자 이집트 동료는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그는 일면식이 없는 이방인이 자신의 집에 손님으로 왔다 해도, 손님은 당당하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요구할 수 있고, 집주인은 성의껏 음식과 마실 것을 내야 한다고 했다.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도 최선을 다해 음식을 대접하는 사람들인데, 직접 초대한 손님이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을 먹지 않으니 얼마나 당황하고 속상했을까. 



한 달의 시간이 흘러 또다시 연락 회의가 열렸고 한 번 더 모로코 지휘관 관저 만찬에 초대를 받았다. 이미 채식주의자임을 밝혔으니 ‘이제는 이해하겠지’ 하는 편안한 마음으로 초대에 응했다. 지난번과 달리 이번 만찬은 샐러드로 시작했다. 모로코 지휘관이 말했다.


“한 대위, 기억합니다. 샐러드 다음에는 계속 고기 요리니까, 샐러드 많이 드세요.”


“지휘관님, 감사합니다.” 


나는 접시 한가득 샐러드를 담아왔고, 얼마 되지 않아 메인 요리인 고기 요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모로코 지휘관이 큰 고깃덩어리를 내 접시에 올리며 말했다.


“지난번에도 먹었으니 이번에도 괜찮지요?” 


“아... 네...” 


결국 두 번째 만찬도 고기로 배를 가득 채우고서야 끝이 났다. 두 번 모두 속이 좋지 않아 소화제와 위장약을 먹어야 했고, 비 육식주의자로서의 신념이 깨진 사건이었지만, 지금은 재미있는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 덕분에 모로코 대표 음식인 타진도 먹어보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그 뒤로 나는 모로코 지휘관의 만찬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


1년 반 정도 지나 장관님을 모시고 지방 행사에 갈 일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장관님은 나를 기억하시지 못했다. / 사진 출처: new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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