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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렉시테리언 Oct 01. 2021

그 땅에 무슨 일이?

유엔(UN) 군은 어떻게 서부 사하라에 주둔하게 된 걸까?


유럽의 열강들이 경쟁적으로 식민지를 건설하던 시절 스페인은 서부 사하라를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든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식민지 독립에 대한 국제적인 압력과 스페인 내부적인 이유로 스페인도 서부 사하라에서 물러나게 된다.


현지인들은(사하라위, Saharawi) 스페인이 서부 사하라를 자신들에게 넘겨주리라 믿었다. 하지만 다른 식민 국가의 독립과정이 그러했듯, 현실은 사하라위의 기대와 반대로 흘러갔다.


스페인이 서부 사하라를 떠날 무렵, 서부 사하라 북쪽에 위치한 모로코는 역사적 배경을 주장하며 서부 사하라에 대한 자신들의 영토권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975년 11월 무려 35만 명의 모로코인을 서부 사하라 지역으로 내려보낸, 이른바 녹색 행진(Green March) 시위를 통해 모로코는 자신들의 영토권을 점점 강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녹색 행진에 놀란 스페인은 마드리드 협정(Madrid Accord)에 서명하게 되고, 마드리드 협정을 통해 스페인은 모로코와 모리타니아에 서부 사하라를 넘겨주기로 한다.


사하라위는 즉각적으로 반발했다. 스페인 식민에 대항하기 위해 구성했던 폴리사리오 전선(Frente Popular Para La Liberacin De Saguia El Hamra Y Rio De Oro, Frente Polisario)을 통해 모로코와 모리타니아에 대한 무장 투쟁을 전개했고,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해 자신들의 국가인 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Sahrawi Arab Democratic Republic) 수립을 선포했다.


사하라위의 힘겨운 싸움에 이웃 국가인 알제리가 힘을 보탰다. 알제리의 도움으로 알제리 남부 틴두프(Tindouf) 지역에 망명 정부와 난민 캠프도 세울 수 있었다. 폴리사리오는 모로코와 모리타니아를 상대로 게릴라전 위주의 무장 투쟁을 이어갔다. 예상치 못한 사하라위의 강한 반발에 모리타니아는 서부 사하라에서의 모든 권리를 포기한 채 1979년 서부 사하라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하지만 모리타니아가 떠난 자리에 모로코가 바로 치고 들어왔다. 아무리 알제리의 지원을 받는다 해도, 수적 열세인 폴리사리오가 게릴라전으로 상대하기엔 모로코군은 너무나 큰 상대였다. 모로코는 폴리사리오의 공격을 막기 위해 흙으로 된 둑(흙둑, Berm)을 쌓으며,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해갔다. 폴리사리오는 점점 동쪽으로 몰려갔다.


전쟁이 계속되고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자 1985년 드디어 유엔(UN)과 아프리카 통일기구(Organisation of African Unity, OAU)가 개입했다. 민족자결권에 따라 주민들의 선거를 통해 어느 국가에 속하게 될지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무력 분쟁도 1991년 군사 협정(Military Agreement)을 통해 중단하기로 했다. 그러나 모로코가 이미 서부 사하라의 약 2/3 그리고 핵심 지역인 서쪽 해안 지역을 전부 차지한 상태였다.


이로써 흙둑을 기준으로 서쪽에는 모로코가, 동쪽에는 폴리사리오가 위치하게 되었다. 동과 서로 나뉘어 있다는 차이가 있지만, 상황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는 우리와 비슷하다. 흙둑을 기준으로 완충지대를 설치하고, 일정 지역 내 각자의 군사력을 제한하는 상황도 우리의 군사분계선 그리고 DMZ와 매우 유사하다.


유엔은 평화 유지군의 일환으로 서부 사하라 선거 지원 임무단(UN Mission for the Referendum in Western Sahara, MINURSO)을 창설하고, 무력분쟁 중단(cease fire) 감시와 선거를 위한 준비 임무를 맡게 했다.


유엔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1991년의 상황에서 큰 변화는 없다. 가장 큰 이유는 모로코와 폴리사리오 양측이 선거에 참여할 선거인 명부에 합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폴리사리오는 스페인 지배 당시 서부 사하라 지역에 거주했던 현지인만 선거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모로코는 스페인이 떠난 뒤 서부 사하라 지역으로 유입된 인원들까지 선거인 명부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각자 서로에게 유리한 선거인 명부를 꾸려, 자신들이 원하는 선거를 치르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30년이 흘렀다.


모로코 지역, 즉 흙둑의 서쪽 지역은 사실상 모로코 영토가 되었다. 곳곳마다 모로코 도시를 세우고, 각종 기반 시설을 만들었다. 대서양으로 이어진 항구를 통해 어업과 광산업 수출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반면 폴리사리오 지역, 즉 흙둑의 동쪽 지역은 30년 전과 별반 차이가 없는, 아니 정확히는 사막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다. 모로코가 서쪽 해안지대를 차지하고 흙둑으로 대서양과의 연결이 단절되자 사실상 내륙(Landlocked)의 형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일까? 폴리사리오 지역에 근무한 경험이 있거나, 스페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옵서버(Observer, 감시단원)들은 폴리사리오에게 상대적인 친밀감과 연민을 느끼곤 한다. (식민 지배 영향으로 폴리사리오 대부분은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단순히 언어적 동질성 때문이 아니라, 그 척박한 땅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유엔의 중립성 원칙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옵서버이기 전에 감정을 느끼는 인간이지 않은가?


일부 옵서버들은 임무단 지휘부나 협상과 선거를 담당하는 정무(Political Affairs) 부서에 유엔의 보다 적극적인 개입을 촉구하기도 한다.


“도대체 유엔 그리고 당신 정무 쪽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겁니까?

유엔 평화 유지(PKO) 임무 중 우리만 인권 모니터링 임무가 없다는 건 알고 있나요?

지난 시간 동안 도대체 무엇을 한 겁니까?”


“그들에게 말해주세요. 협상 테이블로 나오라고.”


사무적이고 건조한 정무 담당의 답변에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는 옵서버는 없었다. 폴리사리오가 협상에 나오지 않는 것도 사실이니까.




누군가 일부 폴리사리오 대표와 정치인 가족들은 스페인에서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사실인지 확인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사이 평범한 주민들만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다. 스페인 식민 시절에도, 모로코와의 전쟁 시기에도, 그리고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야속한 지난 30년의 세월 속에서도.


** 건조하게 말하던 정무 담당은 현재, 외교부로 치면 주 외국 대한민국 대사 격인 “UN 사무총장 특별 대표(MINURSO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



서부 사하라와 MINURSO 지도 / 출처: MINURSO 홈페이지


항공 정찰 중 촬영한 흙둑과 흙둑을 따라 배치되어 있는 모로코 군사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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