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퍼가 파도 위에서 균형을 잡는 것처럼
나는 주기적으로 자기혐오에 빠지는데, 이렇게 해가 잘 안 들고 날씨가 추운 겨울이면 스멀스멀 다크 한 내면의 내가 고개를 든다.
겨울 중에서도 눈이 많이 와서 길이 얼어붙고 하늘은 잿빛인 1월 중순이 고비이다.
시작은 가볍게 '무력감'으로 온다.
평소엔 아무렇지 않았던 일들도 귀찮아지고,
“아- 하기 싫어”를 입에 달고 산다.
그러다 뭐 하나라도 맘대로 안 흘러간다 싶으면 자책을 엄청 한다.
'내가 요즘 빠져가지고 열심히 하지도 않으니까 이런 거야' 라며
마음속에서 나를 마구잡이로 나무란다.
그러다 제 풀에 지쳐서 다 때려치워버리고 싶어 진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나의 일상은 다분히 루틴화 되어있어서, 그나마 그 관성에 기대어 굴러는 간다.
겉에서 보기엔 분주하게 뭔가를 계속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내 영혼은 저기 내 침대에 늘어져 누워있다.
무력하게 늘어져서 내가 왜 이 모양 이 꼴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한다.
끝없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
혐오감에는 중력이 있나 보다.
자기혐오가 있는 사람들은 중심에 나를 놓고 끊임없이 그 속으로 나를 빨아들인다.
마치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려야 끝날 것처럼 내가 나를 잠식시킨다.
그렇다고 이러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지난 몇 년 동안에 주기적으로 오는 자기 혐오감의 파도 속에서 벗어나려고 많은 것들을 해보았다.
병원도 가보고, 심리 상담도 받아보고, 운동도 하고, 비싼 물건을 사기도 한다.
그런데 서른이 된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벗어날 방법을 궁리하는 것보다는 그 속에 빠지지 않게 균형을 잡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
그래서 이럴 때 내가 취하는 방법은, 조금 늦더라도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원래 오전에 했어야 하는 일인데 무력감에 못했다면, 조금 쉬었다가 밤에라도 한다.
마음 근육이 약해지면 육체에도 영향이 간다. 끙끙 앓다가 몸살까지 날 때도 있다.
하루 푹 쉬고, 비싼 딸기도 사 먹고, 다음날 다시 해야 할 일들을 한다.
굉장히 재미없는 방법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것저것 다 해본 사람으로서 이게 정공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억지로라도 천천히 일상을 충실하게 살아낸다.
물론 노오오오오력 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영역도 있다.
신경정신과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계절성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내리셨다.
그래서 돈과 시간을 들여서 치료를 받는다.
심리 상담도 꾸준히 받는다.
매일 하루에 1시간씩 운동을 한다.
몸과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데에는 돈과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결국 체력의 문제다. 몸이든 마음이든, 싸우려면 기초 체력이 탄탄해야 한다.
내 싸움의 대상은 계절성 우울증과 공황장애, 그리고 과거의 상처받은 기억들이다.
그중에서도 최강 보스몹은 '다 때려치우고 싶은 내 마음'.
나는 나를 아끼고 사랑한다. 진심으로 내가 잘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를 성장시키고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늘 노력한다.
그러니까 한 번 씩 내가 실망스럽고 못마땅할 때도 있는 거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을 텐데, 나는 늘 나에 대한 기대가 크니까.
그래서 아무리 우울하고 무기력해도 평소에 하던 것에 10%라도 붙잡고 끈질기게 한다.
조금 느려 보일 수는 있어도 그것은 아주 숭고한 싸움이다.
대단하지 않아 보여도, 그냥 오늘 해야 할 일을 한다.
그러다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온하고 루틴 한 나의 일상으로 돌아와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나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보다.
조금 쉬니까 이렇게 또 잘 해내는 나에게 셀프 칭찬은 필수다.
정신과 치료도 좋고, 심리 상담도 좋고, 셀프 선물과 플렉스도 좋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조장치일 뿐.
결국 파도 위에서 쓰러지지 않고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건 나의 두 다리였다.
오늘은 하체운동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