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드디어 흰 매화가 꽃을 피웠다.
불과 엊그제까지만 해도, 또르르 구르다 말고 가지에 매달려 간을 보던 녀석들이다.
세평 남짓한 화단엔 오래된 동백나무 한 그루와 예닐곱 해 된 청매, 네 살배기 홍로 사과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조금 허전하다 싶어 삼 년 전, 석류나무와 백매(白梅)를 한 그루씩 더 심었고, 그렇게 다섯 식구가 되었다.
어린 매화가 어느 정도 자라면 청매의 한 가지를 잘라내어, 답답한 공간을 트이게 해 줄 작정이다.
혹 연분이 닿는다면 연리지가 되어 줄지도 모를 일이다.
백매가 올해 처음 꽃을 피운 것은 아니다.
작년에도 첫 꽃을 맺더니, 매실 서너 개를 맛보기로 내게 건네기도 했다.
땅을 딛고 선 줄기는 제법 토실하고 든든하다.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만 피어난 꽃들. 어느 여성 수필가는 이렇게 말했다.
“돌아앉아 옷 벗는 여인네처럼, 꽃은 그렇게 다소곳이 피어난다.”
하지만 우리 집 백매는 그런 성숙한 여인이라기보다는, 장난기 많은 개구쟁이다.
밤새 성냥개비로 불장난이라도 한 듯, 가지마다 꽃불(火焰)을 피워놓았다.
대금의 청공을 덮는 갈대청처럼 얇고 맑은 꽃잎 다섯 조각이, 쌀쌀한 아침 바람에 흔들린다.
꽃밥 머리에 인 수술들도 덩달아 떨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옛말에, 매화는 추워도 그 향을 팔지 않는다고 했다.
이미 핀 꽃잎을 다시 오므릴 수야 있으랴.
억지로 피어난 것도 아닌데, 여전히 머뭇거리는 다른 꽃 몽우리들이 괜히 얄밉다.
청매는 양지바른 옆집 담장에 기대어, 게으른 꽃 서너 송이만 피웠다.
나머지 가지들은 아예 개화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터줏대감인 동백나무는 자신이 품던 동박새 두 마리를 훌쩍 날려 보내며, 맹랑한 어린 매화를 놀라게 한다.
매화꽃 내음에 마음을 모으니, 빛바랜 지난날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외갓집에 찾아온 어머니가 나를 안아보겠다며 두 팔을 벌리던 순간,
그 품에서 풍기던 냄새가 바로 이 향기였다.
삼천포 선착장에서 내 목에 자신의 스카프를 매어주던 그림 선생님의 체취도 이 향기와 닮아 있었다.
붉은 꽃받침에 순백의 꽃잎이 어우러진 모습은, 방학 때 우연히 만난 어느 여학생의 모습이었다.
그때 두근대던 내 가슴과 얼굴은 꽃 몽우리처럼 붉게 물들었었다.
분명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매화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퇴계 이황 선생이다.
매화를 읊은 시만 백여 수를 넘는다 하지 않는가.
심지어 타계하시던 날에도 매화분에 물을 주라 당부하셨다니.
그윽한 매화 향은 귀로 들어야 제격이라 한다.
향기를 코로만 맡는 데 그치지 않고, 소리로 듣는 경지까지 가닿는 것.
도산서당의 달빛 아래 피어난 매화를 노래한 시,
퇴계의 ‘도산월야영매(陶山月夜詠梅)’를 조용히 읊조려본다.
새하얀 이 아침, 내 마음에도 작은 꽃 한 송이 피어난다.
뜨락을 거닐자니 달이 사람 따라오고
매화꽃 언저리를 몇 차례나 맴돌았던가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기를 잊었더니
옷깃에 향내 머물고 꽃 그림자 온몸에 가득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