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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샨티 Sep 29. 2024

달 토끼

 아무도 없는 호랑이 굴. 마른 목을 축이려 한밤중에, 옹달샘에 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연분홍 벚꽃 잎이 달빛 아래 흩날려, 새빨간 단풍잎이  세상을  들여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맛깔스러운 초여름 토끼에도, 단맛 가득한 겨울 당근에도 나는 식욕을 느낄 수 없었다.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나는 그저 이대로 삶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빛나던 내 털은 처량하게 빠져버려 몸 여기저기에 벌건 맨살이 드러났고, 뼈만 남은 내 몸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 옹달샘에서 굴로 돌아오다 나는 꼬꾸라질 뻔했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그곳에는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길고 시커먼 그것은 도망치고 싶을 만큼 무서운 모습이었다. 걸음을 멈추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토끼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그것은 나를 닮아 있었다. 내 그림자였다.      

 

 그림자는 매일 밤 모양을 바꾸었다. 금방이라도 내 등을 덮칠 듯한 유령 같은 모습이었다가, 어느 날은 조그맣고 귀여운 토끼가 되어 있기도 했다. 그림자에 점점 익숙해졌다. 오늘 밤에는 어떤 모습을 한 내가 있을까 하고 기대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푸른 하늘에는 치자색 보름달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보름달 속에는 나와 똑같이 생긴 달 토끼가 절구를 찧고 있었다. 혼자서도 씩씩한 달 토끼가 멋지게 보였다. 달 토끼와 이야기해 보고 싶어졌다. 비가 오는 날이나, 달이 모양을 바꿀 때는 달 토끼가 보이지 않아 나는 불안했다. 하나 남은 희망마저 꺼져버릴 것만 같아서 얼른 비가 그치고 달이 떠오르기를, 그리고 다시 달이 차오르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달 토끼가 잘 보이는 보름달이 뜬 날이었다. 달은 지금껏 내가 지켜본 그 어느 때보다도 크고 둥글었다. 뻐꾸기알, 양배추, 커다란 수박. 아니, 아니 그것보다도 컸다. 나는 내가 아는 모든 둥근 것을 떠올려 보름달 크기를 가늠하려 했지만, 수박보다 더 크고 둥근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보름달은 고개를 뒤로 젖힌 내 얼굴 위로 금방이라도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나는 흥분했다. 보름달을 눈에 넣으려 나는 더 크게 눈을 떴다. 기도하는 소녀처럼 앞발을 모으고 달 토끼를 찾았다.      

 

 보름달 속에는 거인처럼 커진 달 토끼가 있었다. 미소 지은 입 모양까지 다 보이는 달 토끼는 내 얼굴에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고개를 더 뒤로 젖히려고 하다가 훌러덩 나자빠지고 말았다. 달 토끼가 ‘와하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나는 내가 나자빠진 것보다 달 토끼의 웃음소리에 더 놀라고 말았다.     

 “이방토끼야, 안녕.”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달 토끼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그렇게나 생각했으면서도 정작 달 토끼가 말을 걸어오자, 내 입은 헤벌어진 채 다물어지지 않았다.

 “……!”

 “놀라지 마. 이제야 내 목소리가 들리는구나.”

 “아, 아, 안녕.”

 “그래, 이방토끼야. 달에서는 네가 사는 그곳이 잘 보여. 나는, 네가 언제 하늘을 쳐다볼지 기다리고 있었어.”

 “나를 보고 있었다고?”

 “응. 네가 호랑이 굴에 있었을 때도, 섬나라에 갔을 때도 늘 보고 있었어.”

 “그랬어? 난 몰랐어. 나 너무 한심했지? 부끄러워…….”

 “왜? 뭐가 부끄러워?”

 “나는 내 삶이 정말 부끄러워. 언제나 피해자라는 생각을 하는 내가, 남 탓만 하는 내가 너무나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구나. 나는 네가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너는 그렇게 생각했구나. 사실 나는 네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내가 대단하다고?”

 “그럼. 대단하고말고. 호랑이 굴에서 네가 지혜롭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열심히 새끼 토끼를 키우는 네 모성애에 나는 감동했어.”

 “하지만……. 하지만 나는 내 새끼를 끝까지 키우지 못했어. 수컷 토끼에게도 좋은 아내가 되지 못했어. 나는 내가 사랑받지 못한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된 것 같아.”

 “저런저런,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내가 볼 때는, 너는 충분히 사랑받은 것 같았는데, 너는 사랑받지 못했다고 생각했구나.”

 “난 언제나 외톨이였어. 이방인이었다구.”

 “이방인이 뭐지? 왜 너를 이방인이라고 생각해?”

 “나는 모두와 다르잖아. 호랑이와 나는 생김새도 다르고 강자와 약자의 관계였잖아. 어떻게 그들과 같을 수 있겠어?”

 “으음, 그래? 그럼, 섬나라 토끼들하고는 어땠어? 너랑 똑같은 토끼였잖아.”

 “섬나라 토끼들은 나와 생각이 많이 달랐어. 그들은 너무나 냉정해서 자기들의 세계에 나를 넣어주지 않았어.”

 “으음, 그건 좀 생각해 봐야겠는데. 생김새가 다르면, 생각하는 것이 다르면 이방인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해. 약자는 그리고 다수에 속하지 못하면 이방인인 거 아냐?”

 “그래? 살다 보면 원하지 않아도 약자의 입장이 되기도 하고, 가끔은 내가 소수에 속할 때도 있지 않나? 네 말대로라면 세상에는 온통 이방인으로 넘쳐나겠네. 누군가가 너를 이방인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어?”

 “아니, 그런 적은 없어. 내가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어. 힘들 때마다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어.”

 “그렇지? 아무도 너를 이방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오히려 그들은 너를 귀엽다고 생각했고,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가고 싶었을 걸?”

 “정말 그랬을까……?”

 “호랑이 가족은 너를 얼마나 예뻐했니? 게다가 수컷 토끼는 너한테 한눈에 반했잖아. 네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사랑받은 토끼인지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

 “그런가……?”

 “다른 동물들도 그랬을 거야. 너랑 친해지고 싶어도 쑥스러워서 네가 먼저 다가와 주기를 기다렸던 거 아닐까?”

 “내가 먼저?”

 “응. 너는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 봤어?”

 “아니, 그러지 않았던 것 같아. 나는 약자니까 강자인 그들이, 다수인 그들이 먼저 다가와 줘야 한다고 생각했어.”

 “하하핫, 그랬구나. 먼저 말을 걸어주기를 서로 기다린 거였네.”

 “네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랬던 것 같아. 결국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한 거였네. 푸훗.”     

 달 토끼와 이야기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내가 웃고 있었다. 신세 한탄을 하려고 했는데, 몹시 슬픈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달 토끼가 내게 마법을 부리는 것 같았다.


 우리는 마치 오랜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이야기했다. 달 토끼는 계수나무에 처음으로 열매가 맺힌 이야기, 돛대 없는 배로 은하수를 건넌 이야기, 너무 세게 절구를 찧는 바람에 절굿대가 부러진 이야기를 신명 나게 말했다. 달 토끼의 말이 잠시 끊어지면 나도 얼른 내 이야기를 했다. 아빠 호랑이 이야기, 수컷 토끼와 처음 만났을 때 이야기, 다람쥐가 모아둔 도토리를 몰래 찾아내서 먹은 이야기를 달 토끼 못지않게 열을 올리며 말했다. 달 토끼는 의외로 수다쟁이였고, 우리의 이야기는 밤이 새도록 끝나지 않았다.      

 

 나는 점점 보름달을 닮아갔다. 내 마음은 매일매일 채워져 보름달처럼 둥글어졌고, 이방인이라는 두꺼운 옷을 벗어버린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로워졌다. 나는 다시……, 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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