잽-로우가 가르친 단순 반복의 미학
올해 2월에 담배를 끊은 후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새로 삼은 취미가 하나 있다. 시간을 내서 주기적으로 이태원에 위치한 테크노 클럽에 간다. 그곳에서 두세 시간 동안 가만히 음악을 듣는다. 시합이 끝났거나 친구들을 만날 때를 제외하고 술은 잘 마시지 않는다. 옆 사람도 안 보이는 어두운 조명 아래 눈을 감는다. 가만히 음악을 듣다가 음악과 나 둘만 세상에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러다가 불현듯, 마음의 주파수가 디제이의 음악과 맞아떨어진다.
가끔씩 이런 순간을 겪고 난 후 눈을 뜨면 나를 둘러싼 세상이 달라진 듯한 기분을 느낀다. 아마 세상이 달라졌을 리는 없다. 세상을 보는 내 눈이 달라졌나 보다. 아마 눈도 달라졌을 리 없다. 눈을 받아들이는 내 마음이 달라졌나 보다. 각성이다.
비단 음악을 들을 때뿐만 아니라 격투를 하다가도 각성하는 순간이 있다. 세 번째 시합을 통해 마음이 마치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처럼 기지개를 켜는 경험을 했다.
성남에서 치러진 3전. 어릴 적 분당에서 음악을 배웠기에 이전에 이 동네를 방문했을 때면 매번 향수를 느꼈지만 이 날 만큼은 달랐다. 계체 날 마주한 선수들과 시합 관계자들, 심지어 편의점 직원까지도 사나워 보였다. 성남시 킥복싱 협회에서 주최하는 대회에 출전했는데 동네에 살기가 어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계체 날 마주한 상대는 거인이었다. 이전까지 상대했던 이들과 신체 조건이 달랐다. 1, 2전 시합 때 -75kg 급으로 뛰어 이번 시합 때는 -70kg로 체급을 낮췄는데 상대가 -72kg 계약 체중을 제안한 이유를 납득했다. 저 키에 70kg까지 몸무게를 빼긴 쉽지 않아 보였다. 이번에는 거인이라니. 상대를 보고 놀랐지만 그간의 수련을 믿고 이기기 위한 방법들을 떠올렸다. 유튜브에 ‘키 큰 사람을 상대하는 법’을 열심히 검색한 기억이 난다.
이번에도 치열하게 맞붙은 결과, 연장전에 돌입. 2:1의 아쉬운 판정패. 다음은 시합 후의 소회를 적은 기록이다.
2023년 6월 17일의 기록
이번 시합은 유일한 일반 수련생으로서 연맹 사범님들과 함께 수련하고 출전했다. 지난 시합 때 잔뜩 쫄았던 나는 피지컬이 비슷한 상대와 시합하길 바랐다. 그러나 72kg 계약 체중 오퍼가 왔을 때의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최소 185 정도 돼 보이는 상대를 마주하니 이번 시합이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장님께서 잽-로우를 주문하셨고 나 또한 이를 기억하고 있었으나 몸이 말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상대의 킥 거리 안으로 들어가는 게 두려웠다. 영상을 보니 잽-로우를 맞출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다음 시합 때는 세컨의 말은 신의 음성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믿음을 키우자.
접전 끝 무승부가 되어 연장전에 돌입했을 때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상대 또한 지쳤는지 3라운드 중간에 사자후를 질렀다. 치열하게 주고받은 후 아쉽게 2:1 판정패를 했지만 나보다 월등하게 큰 상대와 싸워 본 소중한 경험을 얻어 감사한다.
나중에 시합 영상을 보며 안 사실이지만 나는 그를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세컨의 지시를 믿고 잽-로우킥 콤비네이션을 질렀다면 이겼을 터. 이전 시합과 달리 상대의 공격도 약간 보였고 세컨의 지시도 명확하게 들렸는데 그의 킥 거리 안으로 들어가는 게 무서웠다. 더불어 세컨의 지시를 수행하기 위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수백 번 기술을 연습해도 그것이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게 시합이다. 세컨의 말을 듣기에는 내 수련량이 한참 모자랐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쉬움 속에서 한 가지 마음을 다졌다. 잽-로우킥을 수백 번 연습하겠다. 눈을 감고도 기술을 쓸 수 있도록 수련하겠다.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의 근거는 수없이 연습한 기술뿐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순간, 알 수 없는 기분을 마주했다. 정체 모를 자신감이 솟았다. 결국 한 가지 기술을 삽질하다 보면 그가 내 편이 되어 나를 돕는다는 말 아닌가. 더 이상 내게 필요한 것은 재능이나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눈앞에 놓인 단 하나의 기술을 갈고닦을 의지만 필요했다. 삶을 지배하고 있던 수많은 고민들이 거품처럼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각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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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임윤찬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근본 있는 음악가의 특징을 언급하며 “그러한 연주는 시대가 내리는 천재 음악가들만 가능한 것 같다”고 밝힌다. 곧이어 그는 “저처럼 평범한 사람은 매일 연습하며 진실하게 사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첫 음을 누를 때 자기 심장을 강타해야 비로소 다음 음으로 넘어가는 그는 진실하기 위해 한 음을 연습하고 또 연습한다. 아마 내가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그는 한 음을 연습할 것이다. 차를 깊이 우리듯 음을 수없이 치고 들으며 표현을 우려낼 것이다.
이 젊은 거장은 셀 수 없이 많은 연습을 거듭하며 단순 반복의 미학을 깨달았나 보다. 하늘에 우러러 어제보다 진실하기 위해 음을 치고 또 친다. 참으로 마음에 드는 수련법이다. 무도인 이소룡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만 가지 킥을 한 번씩 연습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의 킥을 만 번 연습한 사람은 두렵다."
만 번의 킥이 나를 진실되게 만듦을 3전 시합의 패배를 통해 깨달았다. 이때의 각성을 실천에 옮기고자 곧바로 다음 시합을 준비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