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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 혜진 Jan 10. 2019

1. 이민 가면 행복하냐고 묻는 당신에게.

 

당신은 한 번이라도 어딘가 다른 곳에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일테면, 공기 좋고 물 맑은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농사나 지으면서 살아볼까 하는 생각. 요즘 핫하다는 제주도에 가서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처럼 민박집이나 카페를 운영하면서 여유 있게 살아보는 것이 꿈일 수도 있다. 이도 저도 아니면 일가친척이 살고 있는 가까운 농촌도 좋고 어촌도 좋고, 매사가 날카롭게 숨을 조이는 대도시를 떠나 시골 어디쯤으로 가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번쯤 해보지 않았을까. 내친김에 다른 나라에 가서 살아볼까 하는 사람은 왜 없겠나. 대한민국 국민의   50% 이상이 이민을 꿈꿔봤고 그중 이민 가고 싶은 나라 1위가 캐나다라는 뉴스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것으로 보자면,  조사의 오차를 넉넉하게 감안한다고 해도 100명 중 한두 명은 캐나다 이민을 생각해봤을지도 모르겠다. 굳이 캐나다가 아니라도 호주, 미국, 유럽, 심지어 동남아 후진국이라도 한국을 떠날 수만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다. 


 단군 할아버지가 나라를 세운  후 흩어졌다 뭉쳤다 하면서 한민족으로 지내온 세월이  4천 년이 넘었다 하니 그에 비하면 고작 150살 캐나다는 새파랗다 못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나라다. 북극과 붙어 있으니 기후조건도 척박하고, 영어와 프랑스어가 공용어라서 말 배우기도 쉽지 않은 나라. 역사와 전통, 단일 민족국가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캐나다가 어울리는 나라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캐나다 이민을 꿈꿀까. 주변에 아는 사람 한두 명은 이미 캐나다로 떠났을 테니 이 글을 읽기 전 당신은 사람들이 왜 캐나다로 가고 싶어 하는지 궁금하기도 할 테고 이미 캐나다 이민에 대해서 알아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캐나다 이민을 오는 사람 중에는 미국이나 영국 호주 같은 비슷한 나라에서 오는 이들도 많은데 그들은 주로 캐나다에 취직을 했거나 일가친척이 있어서 가볍게 오고 가는 사람들이다. 언제든지 올 수 있고 언제든지 갈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지독하게 못 사는 나라에서 오는 사람들도 많다. 필리핀 같은 후진국에서 오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더 잘살겠다고 온다. 그러니 캐나다 영주권만 손에 쥘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마다 하지 않는다. 난민도 마찬가지다. 못 배우고 돈도 없으니  죽을 각오로 캐나다에 정착하려 애쓴다. 한국은 영어권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가볍게 왔다가 가볍게 갈 수 있는 형편도 아니고 경제적으로 못 사는 나라가 아니다 보니 많이 배우고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온다. 젊은 유학생이라고 하더라도 부모가 뒷바라지를 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민을 오지 않아도 먹고 살만 한 것이다. 그런데 왜 모든 것을 걸고 이민을 원하는 사람이 많을까.  


한국인들이 이민을 꿈꾸는 이유는 간단하다. 최근 들어 새롭게 등장한 미세먼지부터 해묵은 고민거리인 자녀교육이나 젊은 이들의 취업 문제, 또는 꽤 낭만적인 이유처럼 보이는 ‘저녁 있는 삶을 위해서’. 이른바 워라벨 이라던가? 그 외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비슷비슷 한 결론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헬조선’ 탈출이다. 몇십 년 전만 해도 이민은 꿈을 좇는 개인의 문제였지만 이제 지옥처럼 살기 힘든 나라를 도망치듯 떠나는 안타까운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마치 난민들처럼. 미세먼지나 기후 변화가 무서운  환경난민, 한국의 비인간적인 입시 경쟁을 피해 달아나는 교육 난민, 일자리가 없으니 밥 먹고 살기 힘들어 떠나는 생계형 취업 난민. 당신은 어떤 이유로 이민을 꿈꾸는가. 


나는 지금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한다는 캐나다 토론토에 있다. 2001년 캐나다에 이민을 왔으니 ‘헬조선’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IMF,  파산한 대한민국을 뒤에 두고 나만 혼자 살자고 도망 온 셈이다.  그래도 마치 일제시대 때 가난한 소작농이 전재산 탈탈 털어 독립 자금으로  헌납하는 심정이었다면 과한 표현일까? 이민을 결심하고 비자 수속 중임에도 고국의 재건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겠다는 마음이 들었던지 결혼 패물이며 아이 돌반지까지 전부 금은방으로 가지고 가서 헐값에 팔아 버렸다. 금붙이를  다 팔고 나면 곧 금값이 오를 것이고 ' 있는 놈들 좋을 일' 만들지 말라던 이웃의 얄미운 충고를 흘려들었으니 나에게도 바보 같은 애국심이 눈곱만큼이라도 있었나 보다. 빛 얻어 장만한 작은 아파트 가격이 곤두박질치는 시점에 서둘러 집을  팔고 카드빛이며 은행 융자까지 깔끔하게 정리하고 캐나다로 왔으니 꽤 영악한 축에 들지도 못했던 것 같다. 받을 수 있는 융자 모조리 '땡겨' 받고, 카드깡까지 해서 현금 들고 이민 갔다가  국적 바꿔  돌아오면 알 게 뭐냐 던 누군가의 조언을 웃어넘긴 후  ‘그때 그 말 들을걸 그랬네’  하는 후회를 몇 년 동안 하기는 했었다.


이민을 가겠다고 명절을 틈타 일가 친척분들께 고별인사를 드렸더니,  집안 어르신이 “나라에서 먹여주고 키워줬더니 배반하고 떠나는구나. 얼마나 잘 사는지 보자. 인간이 제 뿌리를 지켜야지 남의 나라 가서  잘살아 봤자 그게 어디 잘 사는 것이겠냐. 부모 형제 옆에서 인간 도리를 지키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시며 씁쓸하게 나무라셨다. 그 말은 꾸지람 같은 저주였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그토록 원하던 장난감을 사주면 며칠 신나게 가지고 놀다가 어느 순간 자리만 차지하는 애물단지가 되는 것처럼, 그토록 소망하던 명문 대학에 합격하고  잠깐 기뻤던 순간이 지나고 나면 공부의 고단함에 지쳐버리는 것처럼, 꿈에 그리던 직장에 입사하고 나면  집안 어르신들에게 장하다  칭찬 들을 때 말고는 그다지 자랑스럽지도 않고 오히려 언제 때려치울까  하는 생각만 자꾸 하는 것처럼  이민도 ‘체험 삶의 현장’ 같은  경험해본 적 없는 고된 삶이었고 상상 속의 유토피아는 절대로  아니었다. 게다가 잘했다거나 장하다 하고 칭찬해주는 어르신들도 없는 고단하기만 한 ‘현실’이었다. 이민생활 몇 년 동안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는지 어디에서 살아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내내 ‘정착할 준비’만 하다가 결국 몸에 병 만 얻은 채  먹고 살길이 막막하여 돌아온 탕자처럼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조국은 부모 형제는 두 팔 벌려 환대해주었으니 금의환향은 아니라도 어떻게든  자리 잡고 살길은 있을 것 같았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캐나다에서 정착하는 것만큼이나 한국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일도 쉽지는 않았다. 수년간의 경력 단절 때문에 재취업도 쉽지 않았으니 떠날 때보다 형편없이 낮아진 대우를 받으며 갓 대학교 졸업한 신입처럼 바닥부터 시작했다. 아이들은 공부가 수월한 캐나다에서 모든 것이 낯설고 버거운 한국 학교로 옮겨가 원치 않는 힘겨운 생활을 했다. 그것도  삶의 과정이다 위로하며 견뎌냈다. 그러는 중 내내 캐나다가 그리웠다. 그리고 몇 년 전 나는 캐나다에 돌아왔다. 


어릴 때 캐나다에서 살면서 영어에 익숙 해진 큰 아이가 무슨 오기로 덤볐던지 미국 명문대학교에  덜컥 붙었다. 미국으로 대학을 가는 큰애를 따라 둘째도 캐나다에 오겠다고 했다. 한국의 터무니없이 어려운 공부와 쓸데없이 획일화된 공교육에 신물을 내며 캐나다를 그리워했다. 어릴 때 경험했던 캐나다 학교의 '여유'는 한국으로 돌아간 우리 아이들에게는 '신기루 속 오아시스'였다. 설령 신기루를 따라 메마른 사막뿐인 곳에서 길을 잃을지라도 부모로서 아이의 간절한 소망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과 나는 캐나다에 왔다. 흔해 빠진 기러기 가족이 되어 남편은 한국에서 돈 버는 기계로 살기로 했다. 남 들이 부러워하는 '명문대 맘'에 캐나다도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하고 있으니 이쯤 해서 “부럽지?”라고 말할 것 같겠지만 고단하고 외롭기로 치자면 내형 편도 당신과 별반 다르지 않다. 캐나다는 여전히 유토피아는 아니기 때문이다.  사정이야 어떻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디서 살아야 하는지 정하지 못하고 어느 곳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망설이기만 하고 있다. 토론토에 있는 지금은 또 한국이 그립다. 


토론토에서 고단한 이민자로 살다가 궁여지책으로  발을 들여놓은 유학 이민 수속 대행업무를 하면서 또 하루를 넘기고 있다.  대단한 사명감이나 소명의식 없이 밥벌이 수단으로 시작한 일이 벌써 17년을 넘기고 있다. 상담실에 점잖케 앉아서  이민생활에 대한 환상을 갖고 꿈에 부풀어 있는 누군가에게 이민을 권하는 나의 모습은 겉과 속이 다를지도 모르겠다.  떠돌이 삶을 벗어나지 못하는 고달픈 이민자 생활이 “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라는 후회를 할 때도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이들에게 10억 원의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  캐나다 영주권을 받아주는 것이 훨씬 가치가 있다”라며 고객에게 영주권 수속을 권하고 있다. 거짓말은 아니다. 어떤 이의 주장에 따르면 캐나다 영주권의 가치는 적어도 2억, 많게는 20억 정도라고 한다. 유학생이 지출하는 비용 대비 무상 교육, 무상의료, 양육수당, 연금 등을  꼼꼼하게 계산해본다면 그만한 가치는 있을 것이다. 돈의 가치 외에도 누릴 수 있는 기회나 가능성을  보자면 캐나다 영주권의 가치는 꽤 높을 것이다.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해외 거주 국민이 많을수록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중국의 예로 알 수 있다. 중국은 정책적으로 국민들을 전 세계로 내보내 세계를 점령하려 한다는 우스게 소리가 있을 정도다. 하지만 누군가 이민 가면 행복하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이민자로 사는 것이 얼마나 고달픈지 이민자 가정이 처해진 상황은 어떤지, 가족 간의 문제없는지, 부모는 행복한지, 자녀들은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는지, 살다 보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을 것인지 등 정말 중요한 문제를 겉으로 드러내고 이야기 하기는 쉽지 않다. 너나 할 것 없이 잘 사는 척 행복한 척하는 사람들 속에서 크고 작은 아픔을 애써 감추며 살아가고 있다. 나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모르면서도 아는 척 이민을 부추긴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다. 그래도 어쩌다 한번 돈보다 중요한 공명심으로 입바른 소리를 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가슴 아픈 사연에 가슴이 먹먹하기도 하고  고객의 기쁨이 내 보람이 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나는 남의 인생의 계획과 진로에 관여하는 일을 하고 있다. 선택부터 진행과정과 마지막 결과까지, 한 가족과 개인의 희망과 좌절 이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인생 전체를 걸고 바꿔야 하는 계획과 삶이 있다. 배고플 때 맛있는 음식을 먹고  더운 날 시원한 물을 마시는 것이 삶에 기본 욕구 라면  본인과 가족이 현재 살고 있는 나라를 떠나기로 결정하는 것부터 살고자 하는 나라를 정하고 그 나라에 정착 하기까지 심지어는 국적을 바꾸는 시민권 취득까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 오롯이 선택에 의존하는 일들을 나는 그들과 함께하고 있다.  한가정이나 개인이 자기 고국을 떠나서  다른 나라 영주권을 받은 일이  평생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보니 영주권 수속 대행을 맡았던 담당자를 좋게든 나쁘게든 평생 기억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의도치 않게 악연으로 얽힐 때도 있고 어떤 때는 평생 잊지 못하는 고마운 사람이 되기도 한다.  나 또한 잊을 수 없는 진상 고객부터 친구 같은 고객 안타까운 고객들과 함께  같은 이민자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왜 나고 자란 나라를 떠나려 하는지 떠나는 과정은 순탄한지, 이민자로 살면서 기대했던 만큼 만족하거나 행복한지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있다. 제각각 다른 사연을 가진 듯 하지만 그 밥에 그 나물 같은 이야기 속 주인공 들이다. 


나는 날마다 영주권 가능 여부를 타진하는 누군가를 만난다. 미국 영주권이나 비자 문의도 받는다. 영주권이나 비자를 받는 방법은 다양하다.  개인의 상황과 능력과 자격에 따라 답변도  다르다. 학력, 경력, 나이, 영어능력 등 이른바 스펙에 따라 가능성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쓸 수 있는 돈이 얼마냐에 따라서 고려할 수 있는 이민 방법이 다르고 이민하고자 하는 목적은 무엇인지 이민을 하고 싶은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에 따라서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이 다르다. 부득이 고객의 상황과 능력에 대해서 물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의 능력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은 뒷전이고 이민이나 유학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을 한다. 헬조선을 떠나야 하는 이유가 몇 가지나 되는지 손을 꼽기도 한다. 본인들이 한국을 떠나야 하는 이유를 타인에게 설명하면서 상황을 정당화시키고 스스로 의지를 굳히는 것이다. 그들 중에는 ‘까짓 이민제도 따위는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다. 편법? 불법?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불법이든 편법이든 길을 제시해줘야 하는 게 능력 있는 이민 상담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아슬아슬 다이내믹하거나 조심스럽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만족하고 행복한 사람 불만족하고 불행한 사람 스스로 자랑스러운 사람 부끄러운 사람 성공과 실패의 기준을 정하고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덧뺄셈 하듯 계산해보는 사람, 어느 곳 어느 삶 속에나 있는 그들의 모습이  이곳에도 있다. 



애초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큰애가 하버드에 합격하고 요란스럽게 축하를 받는 와중에 여러 곳에서 농담처럼 책을 내야 하겠다는 말을 들었다. '하버드 맘의, 어쩌고 저쩌고' 간혹은 인맥을 타고 구체적인 제안을 하는 출판서도 있었다. 어느 날 지인이 “하버드생 엄마는 책을 내서 노하우를 전수하는 것이 의무다” 하는 농담을 듣고 진담 일지도 모른다는 코미디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쟁쟁한 집안사람들만 보낸다는 하버드에 평범하다 못해 궁핍 하기까지 한 집안의 아이가 합격했다 하니 궁금하기도 했겠지.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하버드를 보냈을까. 고백컨데 무슨 특별한 비결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아이가 대단히 비범한 것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어린 시절을 캐나다에 살면서 많이 읽고 많이보고 많이 생각할 시간이 있었다는 것. 그 외에 책을 낼 만큼 거창한 노하우 같은 것은 없다. 성공 못한 이민에서도 얻은 것이 몇 가지쯤은 있다는 위안이 남았을 뿐이다. 그것뿐이다. 곰곰이 생각해봐도 그들이 원하는 내용으로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내가 '자기 계발적 인간' 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으르고 맹한 데다 내세울 만큼  유식하지도 않으니 하버드 간 딸도 내 덕으로 간 것이 아니다. 그러니 들려줄 이야기가 없다. 하버드를 보냈다고  대단한 성공을 한 것도 아니지만 ,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지 묻는다면   답변을 하기 위해서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내 얘기를 미뤄두고 다른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내 고객들이자 내 이웃인 토론토 한인들의 삶을 되돌아봤다


특별한 케이스나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먼저 써보려 한다. 특별한 맥락도 없고 굳이 교훈을 찾을 필요도 없는 동네 아줌마들 수다 속에 등장하는 가십거리, 토론토 한인들 이야기다. 이민 제도나 수속 과정을 설명하는 내용이 있지만 이야기의 흐름상 필요해서 쓴 것일 뿐  이민 제도나 방법에 대한  안내서는 아니다이민을 권장하거나 가지 말라고 주장하는 글도 아니다삶이 외롭고 팍팍할  잠시나마 서로 이웃처럼 지냈던  고객들을 떠올리면서 썼다시간이 흘러 다져지고 다듬어져  맥락도 있고 교훈도 있는 이야기꾼이 되었을 때 지금의 이 글을 읽게 된다면 민망하고 후회할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오늘은  편안하게 읽고 공감하고 웃어주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다. 이 글을 읽으며 어 이거 내 얘긴데? 싶다면 모른 척 넘어가 주세요~ 어차피 아무도 당신이 주인공인지 눈치 못 챌 테니. 고객과 주변 지인들의 이야기나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를 모트브로 쓰는 글이지만 사생활의 노출을 걱정해야 하니  이름 직업 나이 등 그 사람을 지목할만한 힌트는 모두 각색을 했다. 편하게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어 주시길 바란다. 


종이책 구입이 어려운 분들은 카카오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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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FiUM

에서 전편을 읽을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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