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토 서식자들
토론토는 캐나다에서 가장 번화하고 큰 도시지만 도시 전체가 공원 같다. 반듯반듯하게 정비된 주거지역에도 수십 년생 아름드리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우고 집집마다 잘 정돈된 잔디가 자랑처럼 깔려 있다. 그 집 마당을 보면 집주인이 얼마나 부지런한지 얼마나 시간과 돈을 들여 집을 관리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토론토의 긴 겨울 동안 자기 자리를 묵묵히 지키던 나무들이 혹한을 이긴 위엄을 잊은 채 푼수 없이 보드라운 연두색 잎사귀를 내놓기 시작할 때 토론토 사람들은 이웃끼리 경쟁이라도 하듯 꽃이나 나무를 사다 심는다. 뽑아도 뽑아도 새로 뿌리를 내리는 민들레나 잡초가 온 마당을 점령하면 차라리 잔디를 걷어 내고 새로 깐다. 내 눈에는 주인이 사다 심은 꽃이나 민들레꽃이나 별 달라 보이지 않지만 민들레는 정원 관리에 가장 큰 적이다. 제 맘대로 씨를 날려 아무 데나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집주인들은 원하는 시기와 지정된 장소에 계획대로 꽃이 피기를 바란다. 그래야 집값도 올라간다. 나처럼 잡초나 들꽃이 애처로워 뽑아 버리지 못하고 게으르기까지 한 사람이 옆집에 살고 있다면 동네 분위기를 망친다며 소송도 불사하는 토론토 사람도 있다더라.
고층 사무실 창밖으로 내려다 보이는 주택가 풍경은 하루가 다르다. 큰길 안쪽, 나무가 들어찬 골목마다 연두색 나뭇잎들이 몽실몽실 피어오르다 주택가 지붕과 골목까지 덮어 버린다. 산이 없는 토론토는 지평선까지 녹색 카펫을 깔아 놓은 것 같다. 얼핏 얼핏 지붕의 흔적을 보고 집이 있는 자리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움직이는 사람을 보고 그곳에 길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챈다. 그나마 분주히 오고 가는 차량들과 높게 솟은 빌딩 덕에 이곳이 대도시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 드디어 캐나다에 여름이 온 것이다.
나는 토론토 주택가를 느린 걸음으로 산책한다. 후다닥 스쳐 지나가는 여름을 붙잡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달력 속의 풍경화처럼 푸른 하늘에 하얀 뭉게구름이 느리게 흐르고 굵직굵직한 가로수가 그늘을 드리운 곳을 걷다 보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의외의 모습으로 인간의 구역을 얼쩡거리는 동물을 만난다. 차량이 많이 오가는 토론토 번화가에 캐나다 구스가 가족을 이끌고 보란 듯이 횡단보도를 건너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본 적이 있다. 구스 가족이 무사히 횡단보도를 건널 때까지 운전자들은 나처럼 운전대를 끌어안고 구스 가족을 바라보고 있었다. 싱글싱글 웃거나 입을 떡 벌리고 사진을 찍어 대는 사람도 있었다. 횡단보도의 쓰임새를 구스 가족도 아는 것 일까 신기했을 테니까. 어디선가 불쑥 나타났다 사라지는 도도한 사슴도 일 년에 한두 번은 볼 수 있다.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북쪽 동네의 고속도로에서 길을 지나는 곰과 부딪쳐 응급실로 실려간 운전자 얘기를 들은 적이 있으니 멀지 않은 곳에 곰도 사는 것 같고 애완견과 산책하던 사람이 코요테의 공격을 받았다며 뉴스 앵커가 호들갑스럽게 겁을 주니 나무가 많은 산책로 숲 속에 코요테도 사는 것 같다. 가을에는 토론토를 관통하는 강줄기를 타고 연어 때가 거슬러 올라오고 쌀쌀해지는 초겨울 무렵에는 손가락 마디보다 가느다란 뱀도 자주 만난다. 분주하게 월동 준비를 하느라 겁 없이 바깥나들이가 잦은 듯하다. 날갯짓 한번 하지 않고 하늘에 떠있던 매가 쏜살같이 사냥감을 좇는 모습도 흔하디 흔한 풍경이다. 미키마우스의 주인공인 밤톨만 한 생쥐가 오래된 아파트나 주택을 들랑거리면 집주인은 그 작은 동물 때문에 죽을 것 같은 공포감에 휩싸인다. 아이러니다. 잘못 건드리면 몇 날 며칠 동안 고약한 냄새에 시달려야 하는 스컹크가 집 뒷마당에서 어슬렁 거릴 때는 은근히 긴장이 되기도 하고 겉모습은 귀여워도 텃밭 채소를 죄다 못쓰게 만드는 토끼도 반갑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시멘트 건물만 즐비한 한국의 대도시 생활을 하다 토론토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파란 잔디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청설모 조차 신기했지만 요즘은 아무 곳에서나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내 앞길을 막아서니 더 이상 반갑지 않다. 한가한 산책길을 걷다 보면 청설모 대여섯 마리가 일제히 나를 구경할 때도 있다. 내가 구경거리가 되는 것이다. 매번 마주치는 청설모지만 어떤 놈이 어떤 놈인지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덩치만 조금씩 다를 뿐 검거나 짙은 회색빛의 청설모는 죄다 그놈이 그놈이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나는 커다란 너구리는 마주칠 때마다 당황스럽다. 집 근처 담장을 가림막 삼아 쓰레기통을 뒤지거나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먹이를 두고 다투는 녀석들을 만나면 교활하고 민첩한 모습에 혀를 내두르기도 한다. 너구리도 청설모처럼 덩치만 조금씩 다를 뿐 대체로 그놈이 그놈 같다. 사람 사는 집 근처에 터를 잡고 살면서 작정하고 먹을 것을 구걸하거나 심지어 사람 사는 집에 들어가 먹을 것을 훔치거나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는 음식을 뺏기도 할 만큼 사람 사는 세상에 영리하게 적응하고 사는 녀석들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 자주 찾던 캠핑장에서 미니 오븐에 굽던 돼지갈비를 통째로 너구리 무리에게 도난당한 후 너구리가 더 이상 귀여운 동물로 보이지 않았다.
너구리 때문에 피해본 지인들의 얘기를 듣다 보면 세상에 그보다 더 파렴치한 동물이 있을까 싶었다. 간혹 어떤 녀석들은 늦은 아침이나 이른 저녁에도 길거리를 배회하고 때로는 새끼까지 끌고 나와 먹을 것을 찾아 헤맨다. 너구리에게 먹을 것을 주면 그 사람을 기억했다가 언젠가 찾아온다고 하니 너구리에게 먹을 것을 주면 안 된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그 녀석들이 집 뒷마당에 똥을 싸 놓는다거나 마당 텃밭을 망쳐놓는 일은 다반사고 사람 사는 집 지붕을 뚫고 들어가 터를 잡으면 큰돈을 들여 쫒아 내야 한다. 귀엽다고 가까이하다가 물리기라도 하면 광견병에 걸릴 수도 있는데 어린애들을 얕잡아 보고 공격을 하기도 한다.
불과 몇백 년 전만 해도 북미 원주민과 동물들만 이 구역을 차지하고 살았으니 엄밀하게 보자면 이 구역의 침입자는 도시를 이루고 사는 인간들이다. 나는 가끔 그들의 영역을 침범한 미안함을 만회해보려 동물에게 먹을 것을 주기도 한다. 특히 너구리는 영리하면서도 악착같고 솔직한 생활력 때문에 밉기도 하지만 외면하기도 어렵다. 두 앞발을 공손히 모으고 먹이를 구걸하는 너구리와 한 번이라도 눈을 맞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안쓰러운 표정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날 자동차에 깔려 죽은 녀석들의 너덜너덜한 몸뚱이를 보면 소름이 돋는다.
토론토에는 동물만큼이나 다양한 인종, 민족, 국가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피부색이 희거나 검거나 노란 정도로만 구별할 수 없는 다양한 같음과 다름이 있다. 겉모습이나 보이는 생활 모습만 보고 구별해 내는 것은 길 가다 만나는 너구리를 구별해 내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다. 백인이면 다 백인으로 보이지만 그중에 유태인, 동 유럽인, 러시아인, 영국인 이탈리아인. 인도계나 북아프리카 지역 사람들도 있지만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2~3세 이민자의 경우는 백인은 백인 일뿐 혈통 따위는 구별이 쉽지 않다. 쉽게 구별할 수 없는 백인들 사이에서 자기들끼리는 미묘한 차이로 서로를 구별해 낸다. 그래도 간혹 방금 도착한 1세대 이민자들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햄버거 뱃살이 거대한 미국인도 고유의 백인 혈통을 만들어 가는 추세다. 흑인은 아프리카계 남미계 서인도 계통이나 중동이 뿌리인 흑인도 있지만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서로 다른 흑인들이 무수하다. 그들은 그들끼리는 서로를 구별해 낼 것이다. 피부색의 밝기와 신체 특징에 따라서 국적이나 민족, 혈통을 가늠하기도 하지만 나처럼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흑인은 흑인 일 뿐이다. 중동 지역의 이란, 이집트, 이라크, 시리아, 사우디, 아랍에미레이트. 엇비슷한 억양과 엇비슷한 외모 때문에 특별한 관심이 없으면 분간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그리고 아시아인. 다른 인종들은 '우리'를 구별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한다. 우리가 그들에게 그런 것처럼. 인종 차별을 하는 못된 인간들은 한국인도 중국인, 중국인도 중국인이다. 모조리 다 '칭챙총'이라 놀려댄다. 중국이 얼마나 대단한 위력으로 캐나다와 전 세계를 집어삼키고 있는지 모르니 겁 없이 까분다. 그러나 우리끼리는 겉모습만 보고도 베트남계, 필리핀계 등 동남아시아인들을 한국인과 구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간혹 구별하기 어려운 일본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미세한 차이가 있어서 ‘우리끼리’는 서로를 구별해낸다. 몇 년 전만 해도 중국 사람과 한국사람은 겉모습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최근 한류 열풍으로 중국 사람이 한국 사람과 비슷한 옷차림에 비슷한 화장을 하기 시작했고 머리 스타일도 비슷비슷 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끼리는 핏줄을 타고 내려오는 미세한 유전적 다름을 구별해내곤 한다.
언어적인 차이로 출신 국가를 구별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같은 한국말을 할 줄 안다고 해도 체류 신분이나 캐나다에 얼마나 오랫동안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각자의 처해진 상황은 사연을 듣기 전에는 겉모습만으로 분간하기 어렵다. 영주권자, 시민권자, 유학생, 취업 비자로 일하고 있지만 비자가 끝나면 떠나야 하는 사람, 오랫동안 불법 체류로 생활하고 있는 사람, 심지어 중국 동포 거나 북한을 탈출한 후 한국에서 살다가 캐나다까지 흘러 들어온 ‘난민’ 신청자 도 있다.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만 영어를 잘 못하는 사람도 있고 영주권이 없어도 영어를 잘하는 사람도 있으니 영어 구사능력이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단기 유학생은 짧게는 몇 개월 길어도 일 년 미만으로 캐나다를 방문한 사람들이다. 대학 졸업 후 진로 모색 차 온 젊은이들도 있지만 보통은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다 어학연수차 오거나 캐나다 영주권에 도전하기 전 답사차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와서 공부도 하고 일도 하는 젊은이들도 더러 있다. 비자가 끝나면 미련 없이 돌아가기도 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은 캐나다에 오래 체류할 방법을 찾기도 한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다면 대학 진학을 해서 장기 유학생 반열에 오르기도 하고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도 장기 체류를 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장기 체류를 한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불법 체류도 마다하지 않는다.
장기 유학생 중에는 중고등학교나 심지어 초등 때부터 유학을 온 아이들도 있고 전문대나 4년제 대학, 대학원을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짧게는 2년 길게는 10년 이상 학교를 다닌다. 한국의 부모가 보내주는 돈으로 호의호식하면서 부족함 없이 사는 ‘부잣집 자제분’이든 근근이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어가며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비자 연장을 하고 있는 ‘가난한 집 자식’ 이든 한국에서 대학교나 심지어 대학원까지 나온 대단한 경력자든 어떤 사연을 가지고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 누구나 할 것 없이 캐나다에 오래오래 머물고 싶어 한다. 캐나다 이민법이 다양하니 갖가지 방법으로 영주권을 받으려고 노력을 하는 이도 있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십수 년 전 아니 불과 5~6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 영주권을 신청하고 승인이 나면 그때서야 영주권자 신분으로 캐나다에 와서 맘 편하게 캐나다 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캐나다에 입국해서 학교를 다니거나 취업을 해서 몇 년간 살아야 영주권 받기 유리해졌다. 그래서 영주권을 받고 싶은 4~50대를 넘긴 중년 유학생부터 20대 청년 유학생까지 모두 영주권 취득을 위해 열정을 불사르는 이민 동기들이다. 영주권 취득에 실패해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시도와 실패를 반복하면서 오랫동안 캐나다를 떠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와중에 능력이 좋아서든, 운이 좋아서든, 영주권을 받은 사람들은 드물게 있다. 영주권을 받기까지 그것만 바라보고 더러운 일도 참고 힘든 일도 견뎌왔으니 영주권을 받으면 세상을 얻은 듯 행복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정작 영주권을 받고 난 후 성취감보다 허탈함이 크다는 이들도 있다. 별 대단한 것도 아닌 것을 얻기 위해서 많은 것들을 포기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애써 받은 영주권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미국이나 유럽으로 유랑길에 오르는 이들도 더러 있다. 그들의 역마살은 캐나다 영주권을 취득했다고 해서 만족하고 정착할 팔자가 아닌가 보다.
캐나다 사람이라고 하면 흔히 유럽계 백인을 연상하기 쉽다. 하지만 최근 몆십 년간 다양한 이민자들이 이곳저곳에서 몰려와 자리 잡고 살고 있으니 피부색이나 혈통 상관없이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 캐나다 사람이다. 캐나다 시민권은 영주권을 받은 후 3년 이상 거주한 후 신청할 수 있다. 한국이 이중국적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캐나다 시민권자가 되려면 대부분 한국 국적을 포기해야 한다. 그러니 캐나다 시민권자는 엄밀하게 말하면 더 이상 한국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핏줄을 타고 흐르는 김치 유전자가 쉽게 사라지지는 않는다. Korean-Canadian. 흐르는 물살에 뗏목을 타고 정처 없이 흘러가다 보니 시민권까지 받았지만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흘러온 물줄기를 되돌아보기도 하고 간혹은 후회도 한다. 다양한 사연으로 캐나다 시민권자가 되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한국으로 돌아갈 구실을 찾기도 하고 언제나 그리운 고국 쪽으로 머리를 두고 잠이 드는 ‘수구초심’ 인생이다. 그렇게 동물도 사람도 눈 쌓인 척박한 겨울이나 녹음이 우거진 아름다운 여름에도 서로 무관심한 척 토론토 한 공간을 공유하면서 ‘서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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