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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찾기 Mar 17. 2023

엄만 잘 알지도 못하면서!

둘째 어릴 적 이야기 - 엄만 완전 네 편!

오늘 둘째는 베트남에서 산 작은 선물을 가지고 잠깐 기차 타고 내려와서 선물 주고 식사만 하고 올라갔다(ktx 땡큐). 막내는 봄방학을 맞아 캘리포니아에 있는 친구들을 방문했는데, 대학별로 봄방학이 달라 여행을 다니지는 못하고 같이 공부하고 있단다. 색감이 무척 아름다운 버클리캠퍼스 사진들을 보내왔다. 큰애는 요 며칠 연락이 없다가 오늘 카톡에 며칠 힘들었다는 문자를 웠다. 힘들다는 소리를 잘 안 하는 큰애가 그런 문자를 보내는 걸 보면 스트레스 많은 시기를 보내고 있나 보다.


가족이 모두 함께 살 때는 아이들의 이런저런 일상을 비교적 상세히 알았지만, 아이들이 성장 후 나가 살다 보니 아이들과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이 점점 줄어든다. 몇 년 더 지나면 손님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들들이 온다고 하면 집정리도 신경 쓰이고 음식도 별식을 준비해야 할 것 같고 손님맞이 준비하는 느낌이 벌써 살짝 드니 말이다. 어느새 이렇세월이 흘렀나.


가끔 기억이 뭉텅이로 날아가 버렸나 싶기도 하다. 지나가 버린 날들은 다 짧게 느껴지는 걸까. 그나마 요즘 브런치에 글을 쓰고 또 다른 작가들의 글을 읽다 보면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 오른다. 기억들이 맥락 없이 마구 튀어나오면 글로 어떻게 꿰어야 하나 고민도 된다.


내가 주로 육아와 교육이야기를 쓰다 보니, 브런치글들로도 아이들 키우는 얘기를 종종 읽게 된다. 좀 남다른 아들을 키우는 엄마들의 고민글이 많은 거 같다. 산만하고 사회성이 떨어지는 친구들도 있고, 일반적이고 무난한 아이들과 조금 달라서 키우느라 애쓰는 부모들의 글을 꽤 만나게 된다. 그 글들로 까마득히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들이 촉발되어 떠오른다.


둘째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학교에 적응이 힘들었던 기억들이 많다.


둘째는 11월 후반부 생일인데, 어릴 때부터 키도 크고 체격도 다부진 편이고 얼굴도 야무져 보였다. 그런데 사실은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좀 느리게 가는 아이였다(어릴 때는 헛나이 먹은 건 티가 난다). 지능이 늦된 게 아니고, 사회성 발달이 더뎠다. 그리고 규범을 따르거나 하는데 약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당연한 틀을 이해하고 지키는데 시간이 걸렸다.


초1 때의 일이다. 한 학기 마무리 하던 날 선생님과 일대일 면담이 있었다.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컴퓨터 수업을 한 학기 둘째가 들어가지 않았다는 거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했더니 담임선생님이 가르치는 게 아니고 컴퓨터수업 선생님이 따로 계신 데다가 이동수업이고 반이 섞여서 파악을 못했단다(나도 남편 개원준비에 바쁜 시기여서 섬세히 돌보지 못했을 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계기는 면담 며칠 전에 운동장 순찰하시던 어떤 선생님이 운동장구석에서 땅 파고 있던 둘째를 발견했단다.

그 선생님이  "너 수업 안 들어가고 여기서 뭐 하냐?" 하셨더니, 

둘째가 ", 이 학교 학생 아닌데요" 했다고(사립학교여서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당황스럽고 황당했다. 담임선생님이 둘째에게 수업 안 들어간 이유를 물었더니 컴퓨터수업 첫날 컴퓨터선생님이 너무 무서웠단다. 그래서 그다음부터 안 들어가고 운동장에서 벌레관찰하며 혼자 놀았다고 했다. 선생님 보기엔 덩치도 크고 얼굴은 멀쩡해 보이는 애가 남들과 다른 행동을 많이 하니, 심리상담을 받아보면 어떻겠냐고 조심스레 말했다(남편과 고민 끝에 상담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다).


초 2 때는 여자아이들과 힘들었다. 친구 생일날 초대받아 갔는데, 파티 후 놀이터에서 놀다가 무슨 다툼이 일어났는지 가방도 내팽개쳐두고 귀가했다. 둘째 말로는 여자애들이 단체로 자기를 공격해서 도망 왔다고 했다. 학교 안 다니고 싶다고, 내일부터 학교 안 갈 거라고 했다.

놀이터에 가봐도 가방이 없었고, 수소문을 해도 소재파악을 할 수 없었다(결국 찾지 못했다. 교과서며 다 새로 구해야 했다). 둘째는 한 10 살정도까지는 마음이 급하면 말을 빨리 하지 못했다. 누군가가 다다다다 하고 쏘아붙이면 눈만 부릅뜰 뿐 말문이 막히는 타입이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이 정리되어 금방 나오지 않는 거 같아 보였다. 그래서 초등학교 저학년 시기가 무척 힘들었으리라 싶다. 많이 안타까웠다(가방사건 계기로 나는 부모교육(P.E.T) 12주간 받고 수료했다. 아이를 이해하고 돕고 싶은 마음으로).


나는 둘째가 좀 독특한 구석이 있으니까, 여자애들과 말다툼을 했다거나 하는 말을 들으면

둘째야, 네가 신사답게 굴면
걔들도 잘할 거야.


줄곧 이렇게 얘기했었다. 그러면 둘째는


엄만 알지도 못하면서


이렇게 말하며 울기도 했다.

어떤 여자아이 때문에 유독 힘들어했었다.


부모교육 강사가, 아이가 학교에서 힘든 일이 있을 때는 일단 무조건 아이 편을 들으라는 얘기를 했다. 자세한 앞뒷말은 생각이 안 나는데, 내 부모가 내 말 안 들어주고 딴 애 편 들어주면 서럽지 않겠느냐는 내용이었던 거 같다.

나는 늘 내 아이들에게 마치 계명을 외듯 "네가 신사다우렴, 네가 잘하렴" 이런 당부했었는데, 머리를 한 대 맞은듯한 느낌이 이었다. 내가 내 아이 편을 들어줬어야 하는데 내 아이를 괴롭히는 애 편을 들어준 셈이구나. 얼마나 속상했을까.

교육을 들은 그날 저녁 둘째에게 말했다.

"둘째야, 엄마가 네 편 안 들고 무조건 신사답게 굴라고 해서 미안해. 너 괴롭힌다는 지지배들 이름(일부러 이렇게 말했고 이름을 연필로 적을 준비를 했다) 다 불러. 엄마가 조리 줄게." 

(이렇게 말하는 게 교육적으로 맞았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말하자 둘째는 펑펑 속 시원한 울음을 터뜨렸고 마음의 울분이 좀 가시는 듯했다.)

둘째는 자신을 괴롭힌 여자아이 한 서너 명의 이름을 얘기해 주다가

"엄마,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A진짜로 나쁜데, B랑 C는  그래도 착하게 할 때도 많아." 나름 깊게 고민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니 힘이 나는 듯, 학교 안 간다 소리도 안 했다.

둘째가 말한 아이들 리스트를 써보고 얘기를 들어보니, 진짜 악당(?)은 한 명이었다.


마침 그 무렵 둘째네 반 누군가의 생일잔치가 있었다. 엄마들까지 함께한 자리였다. 우리 둘째를 괴롭히는 여자애와 그 애 엄마도 왔다. 아! 그때 알았다. 진즉 둘째 말에 귀 기울였어야 했다. 그 여자애를 관찰해 보니 자기 엄마뺨도 찰싹찰싹 때리며 얘기하고, 행동이며 말이 여간 거친 게 아니었다. 어리숙한 남자애들은 당해낼 수 있는 타입이 아니었다.


 나는 세 아들들을 신사다운 아들로 키우고 싶은 마음에 맨날 여자애들에게 잘하렴. 친절하게 대하렴. 신사답게 굴으렴. 이런 얘기만 해줬지, 여자애도 폭력적이고 거칠 수 있다는 생각을 못했다. 초등학교 때는 남자애들보다 여자애들이 대체로 더 야무지고 심지어 힘도 더 센 경우도 많다는 걸 간과했다.


그 후 몇 년은 학기 초 선생님들께 미리 말씀드렸다. 둘째가 키도 크고 야물어 보이는 거와 다르게 '조금 천천히 가는 아이'다. '숲 속에서 뛰어놀면 딱 좋을 천진난만한 아이인데 학교생활 적응이 좀 더디니, 조금 따뜻하게 바라봐 주세요' 하고.(센 친구들로부터 가끔 방패막이가 되어주십사 부탁했다. 선생님께서 살피니 확실히 학교생활 적응에 도움이 됐다.)


내 기억으로 둘째는 4학년때정도부터 다른 아이들과 속도가 비슷해졌다고 느껴졌다.


브런치글들을 보면 요즘은 아이들 심리나 정서를  좀 더 디테일하게 살피고 돌보는 거 같다. 나는 초1 때 상담을 권유받았었지만 의논 끝에 받지 않았었다. 가끔 그때 심리상담을 받았다면 둘째가 좀 편안히 10대를 보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한편으론 우리 둘째가 한국교육스타일하고 좀 안 맞았을 뿐이다라고 생각한다.(좀 유연하고 자유로운 교육환경 속에 자랐더라면 좋았을 아이였다 라는 생각이 종종 든다.)


둘째는 야간자율학습이며(야자가 강제적으로 실시되던 때다) 두발 3cm 컷, 이런 딱딱한 학교규율과 학교시스템에도 숨 막혀했었다. 틀을 안 지키려는 아이에게 혹독했던 선생님들과 불화했다. 학교시스템과 내 아이가 충돌했을 때 나는 내 아이가 숨 쉴 수 있게 조정하려고 노력했다. 


둘째가 대학교에 가고 현역으로 군대 입대할 때까지도,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 잘할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있었다. 어릴 때 놀랐던 마음 때문이리라. 둘째는 무사히 병장제대하고 복학해서는 학생회일도 하고  동아리활동하면서 다양한 공모전에 나가 수상도 했다. 4학년 때는 과 수석을 했다. 과 수석했다는 소식에 나는 눈물이 많이 났다. 선생님 무서워서 수업도 안 들어가고 운동장에서 흙장난하던 둘째가 과 수석을 했다니, 감개무량했다.


난 우리나라 교육환경이 잘 안 맞는 둘째가 무사히 그 과정을 통과하고 자기 길을 찾아 간 게 늘 기특하고 고맙다. 그 과정이 꽤 고단했음을 알기에 그렇다.

그리고 우리나라 교육환경과 맞지 않아 다른 길을 모색하고 도모하고 있는 아이들과 그 부모들도 응원하고 싶다. 지나고 보니 다양한 길이 있고, 남과 다른 게 틀렸다거나 잘못된 건 아니었다.


세상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는 내 아들들과 모든 아이들을 위하여 기도를 드리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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