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꿈이 다이어리 1 - 탄생 편
해꿈이 : 우리 딸 채연이의 태명.
채연이 친할머니의 꿈속에 채연 엄마가 나타나 '어머님, 제가 해를 품었어요!'라고 말했다는 태몽에서 따온 이름.
2016년 5월 5일, 어린이날
그날 아침, 우리 부부는 타이달에서 생중계하는 「키스 어번 NYC 라이브 」를 켜 둔 채 아침을 먹었다.
그런데 내 눈은 아이패드가 아닌 아이폰을 향해 있었다. 햇볕 쨍쨍한 휴일을 집에서만 보내긴 아쉬운 마음에, 어디 갈만한 곳이 없나 열심히 검색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임신 32주 차에 접어든 배부른 아내를 데리고 갈만한 곳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검색된 이벤트와 전시 중에서, 디뮤지엄의 개관 특별전인 '아홉 개의 빛, 아홉 개의 감성'이라는 전시회가 우리의 흥미를 끌었다.
서울 시내에서 내가 가장 살아보고 싶은 곳 1위인 한남동 ‘더 힐’ 맞은편에 있는 디뮤지엄은 건물 안에 여러 개의 레스토랑과 카페가 있고 발레 서비스도 가능하여, 긴 이동이 부담스러운 임산부에겐 더없이 좋은 미술관인 듯싶었다.
이 전시는 사진작가이자 미디어 아티스트인 아내가 추구해온 작업과도 부합되는 부분이 있어서, 우리 두 사람 모두 깊이 몰입하여 즐길 수 있었다.
뱃속의 해꿈이도 뭔가 반응을 보이고 싶었던 건지, 아내는 평소보다 더 크고 강한 태동을 느꼈다고 했다.
제대로 취향저격이었던 전시회가 마음에 쏙 들었던 데다 우리가 좋아해 마지않는 세시셀라 당근케이크와 밀크셰이크까지 먹을 수 있어서 더 좋았던, 볕 좋은 공휴일 낮의 한가로운 데이트였다.
정말 더할 나위 없었던 어린이날이었단 말이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아.
일찌감치 집에 들어와서는 거실에 앉아 맥북 프로로 사진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막 샤워를 끝내고 나온 아내가 사색이 되어 다급하게 말했다.
"양수인 것 같습니다. 대학병원으로 가서 유도분만해야 할 것 같군요."
제발 아니길 바라며 서둘러 찾아간 수지미래산부인과의 당직 선생님은 매우 긴급한 상황임을 알리며, 당장 대학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샤워 후 몸을 닦던 아내의 다리 사이로 조금씩 흘러내리던 물은 양수가 맞았던 것이었다.
수지미래에서는 분당서울대병원 쪽으로 연락을 해줬지만, 우리는 내가 수련한 바 있는 분당차병원으로 갔다.
아내는 통증이 전혀 없다고 했었지만, 분당차여성병원 응급실에 도착해서 시행한 자궁수축검사 상에서는 규칙적인 자궁수축이 체크되었다. 다시 말해, 조기양막파수뿐만 아니라 진통까지 와 있는 상태였던 것.
당시 재태 연령은 32주 2일.
해꿈이가 세상에 나오기엔 아직 너무 이른 타이밍이었다.
아내 앞에서 티를 낼 순 없었지만, 내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레지던트 시절에 신생아집중치료실에서 봤던 32주짜리 이른둥이들이 어떤 상태였었는지 돌이켜 생각해보는가 하면, 이른둥이에게 나타날 수 있는 각종 합병증들이 벌써부터 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라보파(자궁수축억제제)와 항생제 투여를 곧바로 시작했고, 폐성숙주사(덱사메타손)도 들어갔다.
그러나 폐성숙주사를 1회 더 투여할 수 있는 24시간 후까지 분만을 지연시킬 수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산부인과 측에서는, 분만실로 입원을 해서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자고 했다.
그때부터 해꿈이 엄마는 시간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온종일 침대에 가만히 누운 상태로, 용변도 그 자리에서 누운 채로 받아내야 하는 고행의 시간을 꼼짝없이 견뎌야만 했던 것이다.
2016년 5월 6일
다음날 아침, 산모의 심장박동이 너무 빨라져서 라보파를 끊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런데 다행히 라보파를 끊은 후에도 자궁수축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해꿈이의 상태도 안정적이었다.
"자궁수축제 없이도 진통이 잡혔고, 염증 수치도 아직 괜찮습니다. 하지만 분만을 지연시킬 수 있는 건, 최대 일주일 정도입니다. 다만 진통이 다시 시작되면, 약 투여 없이 바로 분만을 진행할 거예요. 그리고 혹시라도 감염의 징후가 나타나면, 곧바로 아기를 꺼내야 합니다."
아침 회진을 온 산부인과 주치의 선생님의 말을 듣고선, 조금이나마 안도할 수 있었다. 조기양막파수로 바로 유도분만을 진행해야 한다고 했던 전날 저녁보다는 훨씬 더 나은 상황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쨌든 하루라도, 아니 단 몇 시간만이라도, 해꿈이가 엄마 뱃속에서 더 오래 버텨주기를 기도했다.
첫 번째 폐성숙주사를 맞았던 5월 5일 밤 10시에는 다음날 밤 10시가 까마득하게만 느껴졌었는데, 다행히도 무사히 하루를 넘기고 두 번째 주사를 맞을 수 있었다.
그러고도 하루가 더 지나갔다. 정말이지 그때는 해꿈이가 엄마 뱃속에서 버티는 1분 1초가 금쪽같이 소중하게 느껴졌더랬다.
2016년 5월 8일, 새벽 2시 20분
밤늦도록 아내 곁을 지키다가 귀가한 지 한 시간도 채 안 되었을 때, 아내로부터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왔다.
자기야! 나, 아기 낳아야 할 것 같대!
어찌나 빨리 달렸던지, 수지에 있는 우리 집에서 분당차병원까지 20분도 채 안 걸려 도착했다.
길가에다 차를 버리듯이 주차해두고는, 숨 쉴 틈도 없이 달려가 지하 1층 분만장 호출벨을 눌렀다.
'소파에서 잠시 기다려주세요.'라는 간호사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거침없이 분만장 문을 열어젖혔다.
분만장 안으로 들어서는 내 귓가에 가늘지만 (그 어떤 소리보다 더) 선명한 하이 피치 사운드가 들려왔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 소리가 우리 해꿈이 울음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보니 이제 막 엄마 몸 밖으로 나온 해꿈이를 소아과 선생님과 간호사들이 둘러싸고 있었고, 출산을 끝낸 아내가 후처치를 받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해꿈이는 곧 이송용 인큐베이터에 실려나왔다.
담요에 쌓인 채 얼굴만 빼꼼히 나와있는 해꿈이의 낯빛은 다행히 건강한 핑크색이었다.
"아프가(Apgar Score) 몇 점 주셨어요?"
Apgar Score : 출생 직후에 소생술이 필요한 신생아를 계통적으로 알아내기 위한 점수 체계. 심박수, 호흡, 근력, 자극에 대한 반응, 피부의 색깔 등을 기준으로 1분과 5분에 점수를 매긴다.(소생술을 시행할 경우, 그 이후에도 5분 간격으로 점수를 매긴다.)
나는 최대한 나지막하고 부드럽게 물어본 거였는데, 인큐베이터를 끌던 2년 차 선생님은 불쑥 나타난 보호자의 첫 질문이 당혹스러웠는지, 아니면 의국 선배 앞이라 버쩍 얼어버린 탓인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습니다!'라며 얼버무렸다.
(파트 체인지가 된 지 얼마 안 된 5월 초였던 탓에, 그 2년 차 선생님은 아직 어탠딩 경험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문득 첫 분만 어탠딩 들어가면서 두근두근 했던 그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라 삥싯 미소가 그려졌다.)
내가 직접 눈으로 확인한 해꿈이의 상태는 아주 좋아 보였다.
내가 만약 해꿈이에게 아프가 점수를 준다면, 10점/10점을 주고 싶었다.
양막이 파열된 채로 엄마 뱃속에 있는 이틀 동안 호흡 연습을 많이 하고 나온 건지, 세상에 나오자마자 아주 힘차게 잘 울어준 것이 그저 기특하고 대견스러울 따름이었다.
해꿈이가 안전하게 신생아집중치료실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후, 나는 아내가 있는 분만실로 가보았다.
진통을 다시 느낀 지 한 시간여 만에 바로 아기가 나와버려서 그런지, 산모는 비교적 쌩쌩한 편이었다.
그래도 새벽에 혼자 있을 때 갑자기 진통이 와서, 많이 놀랍고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해꿈이 울음소리는 들었지만 아직 얼굴은 보지 못한 아내에게 해꿈이와 첫 대면한 이야기를 전했다.
2016년 5월 8일 새벽 2시 44분, 재태연령 32주5일, 1960g으로 예정일보다 50여 일 먼저 세상에 온 해꿈이.
그래도 건강한 모습으로 나와서 힘차게 울어준 것이 그저 대견하고 감사할 뿐이다.
첫 면회 시간.
한나절만에 훨씬 더 또렷해진 모습.
아빠를 바라보기라도 하듯, 나를 향해 있는 저 똘망똘망한 눈을 보니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구나!'하는 생각이 불끈 솟구쳤다.
입에 넣어놓은 경관튜브를 쪽쪽 빠는 시늉을 하는 것이 벌써 입으로 뭔가가 먹고 싶은 모양이었다.
2016년 5월 9일
일요일을 포함해 3일 간 휴진한 후 월요일부터 진료를 재개한 아빠 없이, 엄마만 가야 했던 두 번째 면회.
하루 사이에 해꿈이는 훨씬 더 똘망똘망해져 있었다고 했다.
첫 대변을 보고, 튜브로 첫 우유도 먹었으며, 산소 후드는 벗고 산소도 많이 줄인 상태였다고….
'해꿈아! 앞으로 거쳐야 할 과정들이 만만하지만은 않겠지만, 아무쪼록 씩씩하게 잘 이겨내고 순조롭게 잘 자라서 건강하고 예쁜 모습으로 엄마·아빠랑 같이 집에 가자! 사랑하는 우리 아가 해꿈이, 화이팅!'
이 글은 2016년 5월 10일에 네이버 블로그에 썼던 포스팅을 가져와 재편집한 것이다.
어느 부모에게나 다 그렇겠지만, 우리 부부에게도 이 탄생 스토리는 아주 특별하고 소중한 의미로 남아있다.
부모 된 자로서의 마음가짐이 흐트러지려는 순간마다 이 이야기를 다시 꺼내보며 결심을 새롭게 할 수 있기를, 미래의 나에게 당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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