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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Oct 15. 2023

조훈현의 “응씨배 세계바둑대회” 우승과 화려한 개선

반상(盤上)의 신삼국지(新三國志)-한중일 바둑쟁패전 其10

승부를 결정짓는 제4국과 5국은 싱가포르에서 열렸다. 당초 이 대국도 중국에서 열기로 주최 측에서 결정하였는데, 결승전 5국을 전부 녜웨이핑의 홈그라운드인 중국에서 개최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한국기원에서 강력히 항의하여 대회장소가 싱가포르로 변경된 것이다. 그렇지만 싱가포르도 중국인들이 주된 인구를 차지하여 반쯤 중국인 것은 마찬가지. 
 
 여하튼 이런 곡절을 거쳐 응씨배의 우승을 결정짓는 마지막 4, 5국이 싱가포르에서 개최되었다. 녜웨이핑으로서는 2국을 모두 지지 않는 이상 우승이 결정되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다. 
 
 4국은 응창기 배 결승 5번기의 향방이 결정된 분수령이 되는 대국이었다. 4국은 초반에는 유장(悠長)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중반, 녜웨이핑이 전국(全局)을 제압하는 기막힌 묘수를 두면서 녜웨이핑 쪽으로 승부가 급격히 기울었다. 지금도 그때 중계방송의 기억이 난다. 처음에는 해설자들도 그 수의 의미를 잘 몰랐다. “왜 이런 수를 두었을까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수네요” 해설자들이 그런 식으로 설명해 나가다가 다음 응수를 하나하나 검토해 나가다 보니 의외로 대응수가 만만치 않았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 제2국에서 알파고는 프로기사들의 허점을 찌르는 기막힌 수를 두었다. 검토와 해설을 하는 프로기사들이 처음에는 이 수가 좀 이상하다고 하며 그다지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았으나, 검토를 하면 할수록 대응방법이 마땅치 않았고, 드디어 인간의 사고를 초월하는 묘수로 평가하게 되었다. 녜웨이핑의 그 묘수도 그러한 종류였다. 
 
 녜웨이핑의 묘수로 승부는 거의 결정 난 듯 보였다. 비록 중반이었지만 조훈현이 이기는 길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대부분의 프로기사들의 의견이었다. 그렇지만 해설자들은 국민들의 사기를 위해 “애국 해설”을 하고 있었고, 이런 해설을 듣고 있는 한국의 팬들은 바둑의 형세를 잘 모르는 체 조훈현의 승리를 기대하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조훈현에게 패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는 시점, 그러나 그때부터 승부의 여신의 장난이 시작되었다. 조훈현은 불리한 바둑을 악전고투 속에서 끌고 나가 판을 어지럽게 만들어 나가고, 그런 혼전을 통하여 마침내 대역전극으로 녜웨이핑의 무릎을 꿇게 하였다.


조훈현 대 녜웨이핑 5번 승부는 사실상 여기서 끝이 났다. 마지막 결승국이 된 제5국, 녜웨이핑은 절대 질래야 질 수 없었던 4국의 충격적인 패배로 인해 탈진 상태에 빠져 그의 두뇌는 이미 승부와는 멀어져 있었다. 4국에서 필승의 바둑을 역전패당한 그는 심신이 걸레같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조훈현은 후에 말했다. 제5국에서 녜웨이핑은 완전히 탈진한 모습의 껍데기뿐인 상태로 승부에 나왔고, 자신은 이미 바둑을 두기 전부터 녜웨이핑의 눈을 보고 그 사실을 알았다고... 그리고 자기는 그 승부를 쉽게 주웠을 뿐이라고...
 
 이튿날 우승컵을 안고 귀국한 조훈현은 김포공항에서부터 시청까지 오픈카 퍼레이드를 벌이게 된다. 뿌려지는 꽃잎에 휩싸인 채, 조훈현은 우승컵을 번쩍 들고 환호하는 시민들의 성원에 보답하였다. 그리고 이 장면들은 TV로 전국에 생생하게 현장중계 되었다. 아마 바둑대회 우승으로 카퍼레이드를 벌인 일은 전무후무한 사건일 것이다. 이때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 하나. 조훈현이 카퍼레이드를 벌이는 차에는 "환 장하다! 조훈현 영"이라는 프래카드가 걸렸다. 사람들은 이걸 두고 "환장하다 조훈현"이라 읽으며 낄낄대었다.  


이날 저녁에는 조훈현의 우승을 축하하는 KBS 특집방송이 전국에 현장중계 되었다.  이때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 조훈현의 우승을 축하하는 특집방송에 각계 인사들과 함께 바둑계에서도 김인 9단이 초청되었다. 그는 이미 전성기는 지났다고는 하지만 바둑계의 어른으로서 여전히 중후한 기풍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조훈현의 우승 축하 방송이므로 당연히 인터뷰는 조훈현에게 집중되었다. 김인 9단은 거의 1시간 동안 말 한마디 못하고 조훈현의 옆에서 꿔다 논 보릿자루 마냥 앉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품 좋은 그는 언짢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드디어 김인 9단 차례가 돌아와 여자 아나운서가 김인 9단에게 짤막한 질문을 몇 개 하고 김인 9단도 간단히 대답하였다. 그리고 그 여자 아나운서의 마지막 질문이 그 중후한 김인 9단을 KO 시켜버렸다. “그런데 김 9단께서는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시죠?” 아니, 프로기사에게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어떡하나. 그 강펀치에 머리를 얻어맞아 멍한 상태에서 한동안 말을 잃었던 김인 9단, 겨우 대답하는 말이 “저 바둑 두고 있는데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응창기 씨가 중국바둑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고, 녜웨이핑이 세계최강자임을 확인하기 위해 만든 「응창기배 세계바둑대회」.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대회는 중국 바둑과 녜웨이핑을 제물로 삼아 한국바둑의 존재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조훈현을 세계최강자로 등장하게 만든 장(場)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응창기 배는 이후에도 매 4년마다 올림픽 대회가 열리는 연도에 개최되었다. 1992년 제2회 대회에서는 순수한 한국 토종바둑인 서봉수 9단이 우승하였으며, 1996년 제3회 대회에서는 유창혁 9단이, 그리고 2000년 제4회 대회에서는 이창호 9단이 차례로 우승하였다. 지금까지 7차례의 대회 중 한국이 5번, 중국이 2번을 우승하였다.  


얼마 전 제8회 응씨배 대회가 시작되어 현재 4강이 결정되었는데, 한국선수가 2명, 중국선수가 2명이다. 한국선수로는 이세돌과 박정환, 현재 우리나라 랭킹 2위, 1위 선수들이다. 특히 우리나라 랭킹 1위인 박정환은 현재 세계 1위를 자처하며 건방이 하늘을 찌를 듯 한 중국 랭킹 1위 커제를 꺾고 준결승에 진출하였다. 
 (이 내용은 2016년의 시점에서 쓴 것이다. 이 대회에서 우승은 중국에게 돌아갔으며, 한국의 박정환은 준우승에 그쳤다. 그리고 얼마 전 열린 제9회 응씨배 대회 결승에서는 우리나라의 신진서 9단이 중국의 셰커 9단을 꺾고 우승하였다.)


 세계 바둑계에 중국바둑의 화려한 등장을 위해 마련한 축제, 응창기배 세계바둑대회는 이렇게 한국바둑의 도약을 위한 잔치 자리로 막을 내렸다. 응창기배 세계바둑대회의 우승을 계기로 우리나라에서는 바둑 붐이 크게 일어났다. 이것은 또 전반적인 바둑 수준의 향상으로 연결되어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바둑이 세계바둑을 제패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는 우리는 응창기 씨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중국이 낳은 불세출의 천재기사, 응창기 씨가 세계최강의 기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중국바둑의 영웅, 기라성 같은 일본의 최강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그 악마 같은 “철의 수문장”. 바로 그 녜웨이핑은 이렇게 세계바둑의 정상의 문턱에서 쓸쓸히 내려와야 하였다. 응씨배 결승에서의 패배를 고비로 녜웨이핑은 급격히 퇴조하게 된다. 영광의 최정점을 바로 눈앞에 두고 내리막 길로 접어든 녜웨이핑. 승부세계의 비장함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계속)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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