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2 빗속에서 후에 왕궁 관광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다. 날씨 정보를 보니 오전 9시부터는 비가 멎는다고 나온다. 숙소 근처 식당에 아침식사를 하고 돌아왔다. 비를 맞으며 돌아다닐까 생각해 봤으나 그냥 맞을 수 있을 정도의 비가 아니다. 일기예보를 믿고 좀 기다려보기로 했다.
비는 여전히 그칠 줄 모른다. 결국 12시경에 숙소를 나섰다. 여행을 떠나올 때 다이소에서 천 원을 주고 산 비닐 비옷을 입었다. 숙소에서 후에성 매표소까지는 2.5킬로 정도 떨어져 있다. 걸어가기로 했다. 길거리에 우산을 쓴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비옷이다. 특히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사람은 판초형의 비옷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다. 20년 전 후에를 처음 방문했을 땐 소도시로 알았는데, 생각보다 큰 대도시이다. 시내에는 고층건물도 많이 보인다. 그리고 외국 관광객이 많아서 그런지 유흥업소도 무척 많다. 느낌으로는 오히려 다낭보다도 큰 것 같다.(물론 실제로는 다낭보다는 작은 도시이다.)
후에 시 한가운데로 흐엉 강이 흐른다. 강 폭은 서울의 한강에 비해 조금 좁은 것 같지만 수량은 몇 배가 될 것 같다. 흐엉강에는 크고 작은 유람선이 떠있는데 비가 와서인지 타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지나가니 한 시간에 40만 동이라며 타라고 한다. 거절하자 호객군이 따라오면서 30만 동, 20만 동으로 자꾸 가격이 내려간다. 그렇지만 이 빗속에 유람선을 탈 마음은 전혀 없다.
강가는 공원으로 깨끗이 정비되어 있다. 한강변 못지않다. 다리를 건넜다. 걸어서 다리를 건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데, 그나마 모두 외국인이다. 다리를 건너 강변 공원을 따라 잠시 걸으니 후에성 매표소가 나온다. 20만 동을 주고 입장권을 끊었다.
후에 성은 베트남 마지막 왕조인 응우엔 왕조(1802~1945)의 왕궁이다. 이 왕궁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이곳은 마지막 왕조가 있던 도시인만큼 시내 곳곳에 많은 유적지 및 유물이 위치해 있다. 그렇지만 오늘은 후에 성만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여러 곳을 다니는 것이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후에 성을 제외한 나머지 유적지를 모두 합한다 해도 후에 성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후에 성은 규모는 면적만을 본다면 우리의 경복궁과 비슷한 정도로 보인다. 그러나 전각 등 시설을 보면 경복궁보다 훨씬 다양하고 많아 보인다. 우리의 경복궁은 전쟁을 대비한 성으로 볼 수는 없지만, 후에 왕궁은 넓은 해자와 높은 성벽으로 미루어 볼 때, 전투를 대비하여 축조한 것 같다.
비옷을 입은 채 성안을 둘러보니 무척 거추장스럽다. 5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도 폭우가 쏟아져 관람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후에는 특이하게도 우리의 가을과 겨울에 해당하는 9월-2월 사이가 에 걸쳐 우기라 한다.
베트남도 한자 문화권이므로 모든 전각의 이름은 한자로 표기되어 있다. 중심 건물은 정사를 돌보는 태화전(太和殿)이다. 경복궁의 근정전과 같이 왕과 신하들이 모여 국사를 논하는 정소로서, 중국 자금성의 태화전 이름을 가져온 것 같다. 이 외에도 선대 왕들의 위폐를 모시는 종묘, 서류 보관소, 문헌보관소, 연회장, 왕궁 관리원들의 주거시설 등 수많은 건물들이 들어서있다. 그리고 왕가의 사적 공간인 자금성은 아름다운 건물과 정원으로 꾸며져 있다.
베트남은 물이 풍부한 나라이다. 그래서 왕궁을 둘러싼 큰 해자 외에 궁 안에는 크고 작은 여러 개의 연못이 있다. 연못을 이용한 아름다운 정원들은 베트남인들의 미적 감각을 말해주는 듯하다. 아기자기하게 이어지는 정원들은 다리의 피로를 잊게 한다.
불교의 나라답게 왕궁 안에는 몇 개의 사찰이 지어져 있다. 궁 안에 있지만 외관상으로는 다른 사찰들과 특별히 차별화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화려하지 않은 수수한 모습이다.
후에 왕궁도 전쟁 중에 많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여러 곳에서 복원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베트남의 경제는 날로 발전하고 있으므로 멀지 않아 원래의 아름다움을 완전히 되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비가 약해지고 있다. 이제 돌아다니는데 큰 불편이 없다. 근 5시간 정도를 거의 쉬지 않고 돌아다녔다. 특별히 계획성 있게 돌아다닌 것이 아니므로 가다 보면 좀 전에 들렀던 곳을 또 가곤 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앞쪽에서 들어갔던 것과 옆쪽에서 들어갔던 경우는 같은 건물, 같은 정원이지만 다른 느낌을 준다.
비가 와서 그런지 날이 일찍 어두워진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5시 반 정도되어 궁을 나왔다.
저녁은 어제 갔던 한국식 고깃집으로 갔다. 종업원들이 나를 아주 반갑게 맞이해 준다. 알고 보니 어제저녁에 남은 고기를 포장하여 종업원에게 주었더니, 종업원들이 그것을 나누어 먹었다고 하면서 고맙다고 한다.
베트남 쇠고기는 맛이 없어 먹지 않으려는데, 메뉴 가운데 "미국 쇠고기 등심"이란 것이 보인다. 이 역시 맛이 없을 것 같지만, 한번 주문해 보았다. 역시 예상대로 거의 쇠고기맛이 나지 않았다. 소에게 사료를 먹여야 고기 맛이 난다. 방목하여 풀만 먹이는 미국소의 경우, 한국과 일본에 수출하는 쇠고기에 대해서는 도축 전에 몇 달간 사료를 먹인다. 그래서 고기맛이 난다. 베트남에 수출되는 미국 쇠고기는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