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19_1) 낙안읍성과 선암사
어젯밤 그렇게 잠을 많이 잤는데도 여전히 졸린다. 여전히 하늘은 흐리고 비가 뿌리고 있으나, 숲 속 공기는 더없이 상쾌하다. 집 밖으로 나왔다. 이곳은 휴양림 치고는 아주 드물게 휴양림 안을 산책하는 길이 없다. 아직 오픈한 지 오래되지 않아 산책로를 닦는 중인지 모르겠으나, 여하튼 휴양림 안에 숲 속 산책길이 없다는 것은 휴양림으로서는 큰 결격 사유라 할 것이다.
숙소에서 대충 아침을 차려먹고 먼저 <낙안읍성>(樂安邑城)으로 갔다. 낙안읍성은 이곳 휴양림에서 1킬로 남짓 떨어진 아주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읍성(邑城)이란 도성(都城)과 대비되는 성벽인데, 옛 관청과 민가를 둘러싼 성이라 한다. 종묘와 왕궁이 있으면 도성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읍성이라고 한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전국적으로 약 200개 가까운 읍성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대개 파괴되고 지금은 20개 정도가 남아있다고 한다.
이곳 낙안읍성은 다른 읍성과 달리 큰 특징이 하나 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대부분의 읍성에는 주민이 거주하지 않는다. 즉 사람이 살지는 않고, 성곽만 남아있는 읍성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낙안 읍성은 읍성 가운데 유일하게 사람들이 실제로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낙안읍성은 현대에도 살아있는 읍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성문 옆에는 큰 주차장이 있다. 성문이 있고, 읍성은 둥글게 만들어져 있다. 이전에 해미읍성을 가 본 적이 있는데, 해미읍성은 지름이 약 200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성이었는데, 이곳 낙안읍성은 상당히 넓다. 지름이 거의 500미터는 되는 것 같다. 성벽의 높이는 거의 4미터 정도는 되어 보인다. 이런 시골의 작은 마을에 왜 이런 크고 튼튼한 성을 지었을까? 아마 순천이 바다를 접하고 있어서 외적이나 해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큰 성을 지은 것 같다.
성문을 들어가면 왼쪽으로는 민가가 있고, 오른쪽은 관청 및 공공시설들로 이루어져 있다. 민가는 거의가 초가집이다. 좁은 골목을 따라 민가가 빽빽이 지어져 있다. 대부분의 집들이 주민들이 살고 있는 집이다. 그러나 순수한 주택이라기보다는 민박집, 식당, 공방 등 반주거 반 영업용 주택이라 할 수 있겠다. 초가집 동네는 매우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이쪽저쪽을 돌아보니, 돌아보는 재미가 솔솔 하다. 큰 감나무에는 감이 주렁주렁 열려 있고, 작은 목화밭에는 목화꽃이 피어 있다. 목화꽃은 처음 본다. 아마 이전에도 목화꽃을 봤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때는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고, 지금은 목화밭이라 표시를 해두고 있으니, 목화와 목화꽃이 이렇게 생겼는지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비가 점점 심해진다. 성벽 위는 산책을 위한 성곽길로 되어 있다. 성곽길로 올라가 읍성의 반쪽을 걸어본다. 성곽 안의 건물들은 모두 새로이 복원한 것들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옛날의 건물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오랜만에 줄지어진 초가집들을 보니 옛 생각이 나기도 한다. 한번 쫌 와 볼만 한 곳이다. 기대보다 훨씬 좋은 곳으로 다른 이들에게도 꼭 한번 방문하도록 추천하고 싶다.
선암사로 갔다. 선암사는 순천 조계산에 있는 사찰인데, 역시 조계산에 위치한 송광사에 비해서는 비교적 덜 알려진 절이다. 집사람이 송광사에는 몇 번이나 가본 적이 있다고 해서 선암사를 선택한 것이다. 폭우로 변한 빗속을 달린다. 도로 곳곳에 고인 물웅덩이를 지날 때는 차가 휘청거리기도 한다.
선암사 가는 길에 서 있는 가로수들은 대부분 감나무이다. 잎은 이미 다 떨어지고 빨갛게 익은 감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다. 저 감을 대체 다 어떻게 할까? 가로수에 감이 열려있다고 해서 함부로 따면 안 된다. 공공의 재산을 훔친 것이므로 절도죄로 처벌될 수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공무원들이 나와서 저걸 모두 딸 수도 없고, 또 모두 딴다고 해서 저 많은 감을 처리할 방법도 없을 테고... 아무 민간 업자에게 감을 따고 처분할 권리를 통째로 넘겨 처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여튼 일단 이것은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고... 감나무 가로수 길은 몇 킬로에 걸쳐 이어진다.
차에서 내려 선암사까지 가는 길은 호젓한 산길이다. 비는 어느덧 잦아들었다. 우산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이다. 낙엽은 지고, 떨어진 빨간 낙엽들은 길가에 쌓여있다. 산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니 잘 가꾼 상록수 숲이 나온다. 왼쪽 계곡에는 아치형의 작은 돌다리가 걸쳐져 있다. 선암사를 상징하는 돌다리로서 홍보 사진에 자주 등장한다. 일주문을 지나 한참 올라가니 선암사가 나온다. 조계산(曹溪山) 선암사(仙巖寺)는 삼국시대에 창건된 절로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데, 천태종의 총본산이라고 한다. 조계산 저쪽에 있는 송광사가 조계종의 중요 사찰이고, 선암사가 천태종의 총본산이라니까 이곳 조계산은 특별한 영험이 있는 곳인가 보다.
선암사 경내로 들어가니 갑자기 비가 거세진다. 마치 폭우와 같이 퍼붓는다. 선암사는 매우 아담하게 생긴 절이다. 비교적 좁은 절터에 여러 절집들이 아기자기하게 균형 있게 들어서 있다. 전체적으로 아늑한 느낌이 되는 절이다. 절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은진미륵이 소재한 논산의 관측사와 비슷한 느낌이다. 집사람은 불공을 드리러 대웅전으로 들어가고 나는 대웅전 옆에 있는 작은 건물 문지방에 걸터앉아 거센 빗줄기 속에 멀리 안개로 뿌옇게 보이는 경치를 감상한다.
선암사도 오래된 유서 깊은 절이다 보니 절에는 많은 문화재들이 있다. 여러 점의 보물과 지방문화재 등을 보유하고 있는데, 사전에 이러한 정보를 알고 왔으면 더욱 관심 있게 관람하였을 건데 준비가 부족해 아쉽다. 이젠 어딜 가더라도 미리 그곳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충분히 파악하고 가도록 해야겠다.
빗소리에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그리고 비안개 속에서 펼쳐져 있는 먼 산의 풍경이 아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늦가을비는 또 다른 가을 정취를 불러온다. 우리나라에는 지금 이 비를 표현할 적당할 말이 없는 것 같다. 가을비라 하겠지만 9월에 내리는 비도, 10월에 내리는 비도, 그리고 지금 내리는 비도 가을비이다. 일본어에는 지금 이 비를 표현하는 아주 적합한 단어가 있다. “시구레”라 하는데, 한자로는 “時雨”라 쓰며, 늦가을에서 겨울 사이에 내렸다 그쳤다 하는 비를 말한다. 그리고 요즈음 부는 심한 바람을 일컫는 말도 있다. “코가라시”(木枯らし)라는 말로 “나무를 마르게 하는 바람”이라는 의미의 초겨울 바람을 뜻한다. 둘 다 아주 정감이 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