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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Jun 08. 2022

영화: 203 고지(203高地)

러일전쟁을 무대로 전쟁의 참혹함과 황폐해져 가는 인간성을 그린 영화

“203 고지”란 중국 요동반도의 남단에 위치한 여순(旅順, 뤼순)에 있는 구릉이다. 여기서는 백여 년 전 노일전쟁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영화 <203 고지>는 1980년에 제작되었는데, 노일 전쟁 시 203 고지의 쟁탈 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노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기리는 국뽕 영화인가 하는 생각도 했지만,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는 성격의 영화였다.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을 꼽는다. 물론 사상자 숫자로나 그리고 무기의 발달에 따른 대량 살상으로 따지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훨씬 더하겠지만, 제2차 대전은 그래도 전쟁 당사국들이 스스로의 피해를 줄이면서 상대방에게 타격을 높이려는 방식으로 전쟁에 임했지만, 제1차 대전은 그야말로 인명을 그냥 사지로 밀어 넣는 소모전으로서, 참혹하게 그지없는 전쟁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 양식을 서로 적대하는 양국이 각자 자동 살인기계를 만든 후, 서로의 병사를 상대방의 살인기계로 밀어 넣으며, 끝까지 병사가 남이 있는 쪽이 승리하는 방식이라고까지 하였다. 이렇게 제1차 세계대전이 참혹할 수밖에 없었는 것은 기술의 발달로 대량 살상 무기가 획기적으로 발전하였으며, 진지전이라는 새로운 전술이 개발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과거로부터 이어 오던 전통적인 돌격 방식 등 기존의 전술 개념을 그대로 도입하였기 때문이라고 학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러일전쟁 당시의 세력 판도와 러일전쟁 그림

우리가 미국 남북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를 보면 양군이 일렬로 밀집 형태로 정렬하여 자신을 조준하고 있는 적진으로 발맞춰 전진한다. 이러한 전투 방식은 그 시대의 무기의 수준에서 본다면 가장 적절한 전술이었다. 그런데 만약 현대전에서 이러한 전투 방식을 취했다고 하자. 기관총 등으로 중무장한 적군에게 단번에 모든 병사가 전멸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1차 대전에서는 이렇게 무기는 발달했는데, 전술은 옛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였기 때문에 참혹한 대량 살상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무기의 발전과 전술의 불규형은 이미 제1차 대전에 앞서 나타났다. 그것이 바로 노일전쟁이었던 것이다. 1904-05년에 걸쳐 일어난 노일전쟁은 일본과 러시아 양군 각각 40만 명의 병력이 동원된 대규모 전쟁이었다. 그때까지 세계에서 발생된 여러 전쟁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노일전쟁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이 전쟁에서 서구의 많은 국가들이 전쟁 당사국인 러시아와 일본에 참관단을 파견하여 전쟁이 돌아가는 상황이나 작전방식, 전투 방식에 대해 참관하였다는 점이다. 세상에 재미있는 구경이 불구경과 싸움구경이라 했는데, 그 말이 딱 어울리는 상황이다.   


노일전쟁은 러시아의 발틱함대와 일본 연합함대와의 해전과 함께 여순 요새를 둘러 싼 여순 전투, 그리고 북만주 지역에서 벌어진 대규모 야전을 포함하여 넓은 지역에 걸쳐 폭넓게 이루어졌다. 필자로서는 노일전쟁으로 소재로 한 영화 및 드라마로서는 일본 드라마인 <언덕 위의 구름>에 이어 두 번째이다. 

러시아 군은 요동반도와 여순항을 지키기 위하여 여순항을 내려다보는 고지에 절통 같은 요새를 구축하였다. 일본군은 러일전쟁이 발생하자 러시아 해군의 정박지가 될 수 있는 여순을 지키기 위하여 이 요새를 공략하고자 하였다. 러시아로서는 여순 요새를 빼앗길 경우 해군의 거점이 없어지므로 이를 필사적으로 지켜야 할 형편이었다. 


일본 육군은 3군을 편성하여 여순 요새를 공격하였으며, 그 사령관은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였다. 철통같이 구축된 요새를 향하여 일본군은 무모한 돌격작전을 반복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203 고지는 러시아군의 여순 요새 옆에 있는 고지로서, 러시아는 예산 문제로 인하여 이 203 고지에까지는 진지를 제대로 구축하지 못하였다. 일본군은 여순 요새의 공격이 계속 실패를 거듭하자 상대적으로 방어력이 취약한 203 고지를 공략하고, 여기에 포대를 설치함으로써 여순 요새를 함락할 수 있었다. 


영화 <203 고지>는 여순 전투에 참여한 주인공 코가 다케시(小賀武志)의 시점에서 관찰한 노일전쟁의 여순 요새 함락전을 다루고 있다. 코가는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후 카네자와(金沢) 현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교사 일을 하고 있다. 그는 러시아의 문화와 예술을 동경하는 러시아 찬양론자이다. 그는 동경에 있는 러시아문학 동호회에 가입하여 모임이 있는 날이면 먼길을 찾아와 모임에 참석하여 러시아의 문화와 문학에 대해 토론한다. 그러던 중 러시아 문학을 사랑하는 마쯔오 사치(松尾佐知)라는 여성을 만나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노일전쟁이 시작되자 코가는 러시아어를 할 수 있다는 이유로 군대에 징집된다. 마쯔오 사치는 코가을 찾아와 결혼을 하자고 애원하나, 코가는 살아 돌아온 후 결혼식을 하자며 이를 물리친다. 그렇지만 사치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코가의 집에서 코가가 돌아오길 기다린다. 

소대장으로 전선에 투입된 코가 앞에는 참혹한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 요새를 향한 무모한 돌격은 연일 계속되고, 그럴 때마다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한다. 코가의 소대에는 각각의 사정을 가진 5명의 부하가 있다. 그 가운데 요나카와 오츠키치(米川乙吉)는 아내가 죽은 후 어린 두 아들과 살고 있었는데, 강제로 징집된 후 아이들은 시설로 보내졌다. 그런 요나카와에게 어느 날 시설에서 아이들이 사라졌다는 연락이 온다. 요나카와는 반 실성 상태가 되어 아이들을 찾기 위해 부대를 탈영하려 한다. 나머지 부하들도 각각 여러 사연들을 안고 있다. 


참혹한 전쟁이 거듭될수록 지금까지 러시아를 존경하고 러시아를 사랑한다고 해왔던 코가도 점점 러시아를 증오하게 된다. 러시아 군사와 맞닥트린 육박전에서는 러시아 병을 무자비하게 죽이기도 한다. 여순 요새에 대한 공략이 실패를 거듭하자 일본군은 요새 옆에 있는 203 고지를 공략하여 그곳에 포대를 설치하여 요새를 공략하는 방법으로 전략을 바꾼다. 막대한 희생 끝에 마침내 일본군은 여순 요새를 공략하고, 요새로부터 여순항에 있는 러시아 함대에 포격을 가하여 러시아군을 패퇴시킨다. 주인공 코가는 이 전투에서 전사한다. 여순 전투에서 승리한 후 일본과 러시아는 강화조약을 체결한다. 


지금이야 우리나라 사람들은 노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지만 그 시대에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이 전쟁은 근대 이후 서양과 동양이 싸워 동양이 승리한 최초의 전쟁이었다. 그래서 당시 서구 열강의 침략에 신음하던 아시아 국가들은 이 일본의 승리에 열광하였다. 당사국인 일본은 물론, 일본과 적대관계에 있던 중국, 일본의 침략에 시달리던 우리나라까지 이 일본의 승리를 기뻐하고 찬양하는 분위기였다. 이후 바로 몇 년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까지도 이 때는 노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를 기뻐하고 찬양하는 글을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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