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무너지는 조선 수군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는 1591년 초부터 침략 준비를 시작하였다. 히데요시는 히타치(常陸) 지역(현재 동경의 오른쪽에 있는 이바라키 현)의 서쪽 및 시코쿠, 규슈, 동해안에 위치한 모든 영주들에게 영지의 산출량 10만 석 당 대선 2척을 준비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포구 마을에 대해서는 100호 당 수부(水主, 가코) 10명을 차출할 것, 그리고 히데요시 직계 영주들에 대해서는 10만 석당 대선 3척, 중선 5척을 건조할 것을 명령하였다. 여기서 대선은 길이 33미터, 폭 11미터로 하도록 하였다.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이때 건조된 배는 모두 일본에서 조선으로 병력과 보급품을 실어 나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 내에서 수송을 담당할 배는 이 임무를 맡은 수군이 자체적으로 해결하도록 하였다.
1592년 4월 12일(음력) 오전 8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 1번대 18,700명이 700백여 척의 함선을 타고 대마도를 출발하여 당일 오후 2시가 조금 지나 부산에 상륙하였다. 이때 왜군의 규모를 경상우수사 원균은 90척, 경상감사 김수는 400척으로 조정에 보고하였는데, 일본 측 기록에는 어느 곳에나 700척으로 나와 있어 700척이 맞다고 생각된다. 왜군이 대마도를 출발하여 부산에 도착하기까지는 6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요즘 부산과 대마도를 연결하는 쾌속선이 운항되고 있는데, 대략 2시간 10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의 왜선들은 아마 거의 노를 동력원으로 하였을 것인데, 생각보다는 스피드가 상당히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잠시 이야기가 옆길로 빠지지만, 나는 20년 전인 2002년에 대마도에 가 본 적이 있다. 그 당시 일본 후쿠오카(福岡) 시의 하카타 항에서 페리를 타고 갔었는데, 4시간 정도 걸렸다. 1만 톤 정도 되는 큰 페리였는데도 불구하고, 대마도의 이즈하라 항에서 내리는 승객은 나를 포함해 몇십 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 부산에서 출발한 쾌속선이 도착하였는데, 거기선 약 800명 정도 되는 승객이 몰려나왔다. 그걸 보곤 대마도는 한국 사람이 먹여 살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일본인들은 대개 배보다는 비행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그런 점이 있기도 하다.
대마도에서 렌터카를 빌려 혼자서 이틀간 섬 곳곳을 돌아다녔는데, 바닷가에 가면 저 멀리 부산이 보인다. 그래서 대마도에는 부산을 관망할 수 있는 공원이나 전망대가 많다. 내가 가 본 곳만 하더라도 <한국이 보이는 언덕>, <이국이 보이는 언덕>, <부산이 보이는 언덕> 등 네댓 곳은 되었다. 밤이 되면 수평선 저 멀리 바다를 환하게 비추는 부산의 불빛이 장관을 이룬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부산 앞바다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왜선이 들어오는 광경을 목격한 부산진 절제사 정발은 급히 성으로 돌아가 백성들을 성안으로 불러 모으고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부산에 상륙한 왜군 측에서는 곧 대마도주(宗義智)가 정발에게 명(明)으로 가야 하니 길을 빌려달라는 내용의 서찰을 성 안으로 던졌고, 정발은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다음날인 4월 13일 왜군은 부산진을 공격하였고, 낮이 되자 성은 함락되었다. 그리고 부산 일대의 진과 포구들이 차례차례 왜군들에 의해 점령당하였다.
부산의 방어를 담당하던 수군은 경상좌수영이었다. 당시 경상좌수영은 수영만에 위치해 있었는데, 경상좌수사는 박홍(朴泓)이었다. 그는 바다를 새까맣게 덮다시피 한 왜군의 함선을 보고 기가 질렸는지 산으로 도망해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이후 왜군은 부산에서 울산에 이르는 경상좌수영의 구역을 수색하여 진해만, 가덕도, 울산 등의 해안 구석구석에 피신해있던 조선 함선 70여 척을 나포하였다고 한다. 이때 나포된 함선이 어떤 종류의 배였는지는 기록에 나와 있지 않다. 이렇게 본다면 자신의 함선을 모두 스스로 침몰시키고 피신한 원균보다도 더 비난을 받아야 할 인물이 박홍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데 이와 반대되는 주장도 있다. 박홍은 경상우수영의 기지들이 왜군 육군의 공격에 의해 순식간에 점령당하자 부하들을 이끌고 피신한 후 동래성 전투에 참여하여 분전하였으나, 중과 부족으로 후퇴하였다고 한다. 이후에도 그는 뚜렷한 전과를 올리지는 못하였으나, 여러 육상 전투에 참여하여 적과 싸웠다고 한다. 굳이 그를 변호하자면,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갑자기 들이닥친 적의 대군에 맞서 싸우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원균만 하더라도 경상 우수영이 거제도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다만 며칠간이라도 일을 정리할 시간이 있었겠지만 박홍의 경우는 순식간에 당한 일이라 아마 전투함들을 자침 시킬 여유조차도 없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기지를 잃어버린 함선들은 차례차례 적의 손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경상우수사였던 원균은 지역 일대가 완전히 혼란에 빠지자 거의 모든 전투선을 싸워보지도 않고, 침몰시키고는 옥포만호 이운용 등 부하 장수와 일부 병사를 4척의 배에 분승시켜 도주하였다. <징비록>에서는 원균이 스스로 자중하여 전투를 피했다고 하는데, <연려실기술>에서는 “원균은 거제도에서 출격했지만, 그 지역의 어선을 적선으로 오인하여 도주하였다. 그가 버리고 간 경상우수영에서는 대혼란이 일어나 당황하여 도망을 가다가 압사하는 자도 있었고, 창고에 불을 지르고 도망친 자가 있었다. 좌수영이 완전 소실되어 원균은 돌아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가덕도로 철퇴했다”라고 나와 있다고 한다.
원균은 참모의 조언을 받아들여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이순신과 이억기 모두 조정의 명령 없이 관할구역을 넘을 수 없다고 이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일본 측 기록에는 이순신과 이억기 모두 일본군의 압도적인 병력 규모에 겁을 먹고 출전하지 못했다는 식의 서술이 가끔 눈에 뜨인다. 또 <연려실기술>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광양 현감 어영담이 국난을 앞두고 장수들이 협력하지 않은 태도에 대해 분개하며, 이순신에게 출전을 간언 했으나 이순신은 이에 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두고 이순신을 비난할 수는 없다. 이순신이 왜의 침략을 알게 된 것은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 이틀 뒤인 4월 14일이라 한다. 그리고 이 당시에는 각 수영이 자신의 관할 구역을 넘어 출동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수군이 경상도의 왜군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조정의 명령이 필요하였다. 이순신의 첫 출전인 옥포해전 시에는 이미 조정으로부터 관할권 밖 출동을 허락받았는데, 그 명령의 하달 시점이 언제인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열악한 정보전달 체계, 그리고 전쟁의 혼란 등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허락을 받는데도 최소한 며칠은 필요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또 지난번에도 언급한 바 있듯이 이 당시 조선 수군은 육군과 마찬가지로 상비군 체제가 아니었다. 병력을 소집하고 또 무기와 병참을 준비하는데 에는 어느 정도의 준비기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적에 대한 정보이다. 지금까지 조선 수군은 주된 임무는 왜구를 물리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침략한 왜군은 단순한 도적 떼인 왜구와는 차원이 다른 중무장을 한 대부대의 정규군이다. 적에 대한 정보도 아직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급하다고 하여 무작정 출동하는 것은 스스로 무덤 속으로 뛰어드는 격이 될 뿐이다. 이순신의 첫 출전이 되는 옥포해전은 왜군이 침략한 지 약 20일이 지난 뒤였다.
왜군이 조선을 침략할 때 해전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전쟁 초반 그들의 예상은 맞아 들어갔다. 그들을 위협할 경상좌수영과 우수영은 자신들이 손도 쓰지 않았는데 저절로 무너져 버렸다. 이어 일본 수군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70여 척의 선박을 나포하는 전과도 올렸다. 이제 경상도 앞바다는 완전히 일본 수군의 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일본군의 후속 부대는 아무런 방해 없이 부산에 속속 상륙할 구 있게 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1번대가 상륙한 지 5일 뒤인 4월 17일 2번대, 3번대, 4번대가 연이어 부산에 상륙하였다. 이들 3개 부대의 병력은 모두 48,000명 정도였다. 일본은 이 정도의 군대를 한꺼번에 상륙시킬 수 있을 정도로 함선을 준비해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