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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Sep 16. 2022

임진왜란(14): 옥포해전 ①

조선 수군의 첫 출전

1592년 4월 12일(음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 1번대가 부산에 상륙한 후 18일에는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가 이끄는 2번대, 그리고 다음날인 19일에는 3, 4번대가 속속 상륙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선봉군은 거침없이 북으로 치고 올라갔다. 전쟁이 발발한 지 16일 후인 4월 28일에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이 대패함에 따라 급기야 선조 임금은 다음날인 4월 29일 수도인 한양을 비우고 몽진 길에 나선다. 


이러한 전황은 아마 이순신에게 속속 보고되었을 것이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관할 구역을 넘어서 적에게 공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부산에서 도피해온 경상우수사 원균은 이순신에게 전라좌수영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적을 치러 와야 한다고 연일 다급하게 연락을 보내고 있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에 속한 각 기지의 지휘관 장수들을 긴급히 소집하였다. 연락을 받은 장수들은 속속 전라좌수영으로 모인다. 한편 이순신은 조선 수군의 전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5월 1일에 전라좌수영서 만나 함께 적을 치러 나가자고 연락을 한다. 전라좌수영에 모인 수하 장수들은 즉시 한결같이 출동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순신은 답을 않는다.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 함께 출전하여야 한다고 했다. 


그럼 당시 전라좌수영과 전라우수영의 병력이 어느 정도 되었을까? 이 무렵의 양 수영의 병력 규모는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1년이 지난 1593년의 시점에서 병력 규모를 보면 전라좌수영이 5,000명, 전라우수영이 10,00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전라우수영의 병력 규모가 좌수영의 2배에 이른다. 이순신의 생각으로는 전라좌수영에 비해 병력 규모가 훨씬 많은 전라우수영 병력이 합세한다면 좀 더 쉽게 적을 쳐부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기다리는 이억기의 함대는 소식이 없다. 휘하 장수들은 전라좌수영 함대 단독으로 출전하자고 연일 이순신을 압박한다. 그러나 이순신은 대답이 없다. 이때 이순신은 왜 그렇게 망설였을까? 그의 속마음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상상을 해보면 먼저 그는 두려웠을 것이라 생각된다. 


군 생활이 13년이 되지만 근무기간의 대부분을 육군으로서 함경도에서 보냈다. 경험한 전투라고 해봐야 우세한 병력으로 소수의 여진족을 상대로 하는 소규모 전투였다. 수군 장수로서의 경험은 이제 겨우 2년 남짓이다. 물론 그동안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많은 준비를 하였지만, 실제로 바다에서 적과 싸워 본 경험은 한 번도 없다. 그리고 이번의 적은 여진족과 같은 소수의 오합지졸이 아니다. 천하명장 신립 장군의 군대마저 단번에 패퇴시킨 정예 중의 정예군이며, 숫자 면에서도 조선군을 압도하는 대군이다.  


4월 12일의 1번대가 도착할 때는 700척의 함선이 왔다고 한다. 그리고 며칠 뒤의 2, 3, 4번대의 상륙에는 400척 이상의 함선이 왔다고 한다. 적 수군의 규모가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우리의 전력은 판옥선 24척뿐이다. 이 작은 함대로 과연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는 막강한 적의 함대를 이길 수 있을까? 


그리고 적의 수군은 어떤 무기로 무장하고 있을지 알 수가 없다. 보고에 따르면 왜군은 조총이란 신무기를 사용하여 조선군을 파죽지세로 격파했다고 한다. 왜 수군은 우리가 모르는 또 어떤 강력한 무기를 보유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제 조선 수군으로 남은 전력은 자신의 전라좌수영과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병력뿐이다. 우리마저 적에게 패퇴한다면 조선은 더 이상 뒤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수군은 절대로 져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 병력은 지켜야 한다. 이순신은 아마 이렇게 고뇌하며 번민에 번민을 거듭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약속한 5월 1일이 되었다. 그런데 이억기와 전라우수영 함대는 오지 않는다. 이억기는 왜 약속한 날짜에 오지 않았을까? 아마 출동 준비를 위한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상비군이 아니기 때문에 병력을 소집하고, 또 병참과 무기도 점검하여야 한다. 그리고 여수를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는 전라좌수영과는 달리 남해와 서해를 모두 커버하고 있는 전라우수영은 관할 범위가 훨씬 넓어 수군 기지도 넓게 분포되어 있다. 각 기지에 흩어져 있는 함선을 모으는 데만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5월 3일 이순신이 친구처럼 가까이하고 있는 녹도 만호 정운이 이순신에게 독대를 요청한다. 이 자리에서 정운은 이순신을 설득한다. 이억기를 기다리다 싸울 시기를 놓친다면 정말 천추의 한이 될 것이다. 도성을 위협하고 있는 적의 후방을 끊어 놓지 않으면 조선은 이 위기를 넘기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장수들을 믿어라. 우리 장수들은 그동안 수많은 왜구들을 물리친 경험이 있고, 또 수군 병사들도 사기가 충천해 있다. 장군을 보필하여 이 전투를 틀림없이 승리로 이끌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한편으로는 이순신을 설득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감을 불어넣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정운의 설득이 주효하여 드디어 이순신은 결정을 내렸다. 바로 다음날인 5월 4일 전라우수영 전 병력을 동원하여 출동한다. 왜군이 이 땅을 침범한 지 22일이 지난 시점이다. 이때 출진한 함선은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착선 46척이다. 이 가운데 전투 능력을 갖춘 배는 판옥선뿐이다. 먼저 설명한 바 있듯이 엽선은 단지 격군(노꾼) 3명만 승선하고 있는 보조선으로서, 척후 기능이나 판옥선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활용될 뿐이다. 그리고 포착선은 어선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전투 능력은 전혀 없고 이쪽의 군세를 과장하기 위해 끌고 다니는 배다. 


이순신의 함대가 출전도 하기 전 조선 수군의 첫 사망자가 나온다. 전투를 두려워하여 탈영한 수군 병사 한 명을 체포하여 본보기로 목을 베고 효수한 것이다. 


지금이야 정보기술의 발달로 적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으며 적의 병력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어느 정도 정보를 확보한 후 함대가 출진하겠지만, 이 시대에는 그것을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경상도 쪽에 왜군이 상륙하여 그쪽을 휘젓고 있으므로, 왜 수군도 아마 그 방면에 있으리라 짐작하고 무작정 부산 방면으로 출동하였을 것이다.    


여수의 좌수영을 출발한 이순신의 함대는 남해도의 남쪽을 거쳐 다음날인 5월 5일 당포에 도착했다. 당포는 통영시가 있는 고성 반도의 아래쪽 왼쪽에 있는 포구이다. 그런데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야 할 원균이 보이지 않는다. 이순신은 원균에게 기별을 넣어 빨리 출동하라고 채근하였고, 그제야 원균은 1척의 판옥선을 이끌고 이순신의 함대에 합류하였다. 그리고 이어 도피하였던 경상우수영 장수들이 3척의 판옥선을 이끌고 합류하였다. 이로서 이순신의 함대는 판옥선 28척이 되었다. 


통영을 지난 이순신의 함대는 거제도 남쪽 해안을 따라 부산 방면으로 향한다. 함대는 일단 거제도의 최남단에 있는 송미포에서 숙영한 후 5월 7일 거제도의 오른쪽 해안을 따라 올라가 옥포에 도착한다. 현재 대우조선 옥포조선소가 있는 위치이다. 드디어 이날 새벽 이순신은 척후선으로부터 적의 함대를 발견했다는 연락을 받는다. 

당포-송미포-옥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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