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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Nov 16. 2020

동서고금 당구에 얽힌 이야기들(8)

여덟 번째 이야기: 일본으로 건너온 당구

서양에서 성행하게 된 당구는 동양으로 건너왔다. 1850년 미국 뉴욕에 당구장이 개장된 그해 일본 나가사키(長崎)의 데지마(出島)에 네덜란드 상인이 당구대를 가져와 당구를 쳤다. 공식적으로는 일본에 처음으로 당구가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원록 시대(元禄時代: 17세기 말-18세기 초)에 그려진 민속화에는 나가사키(長崎)의 데지마(出島)에 있는 네덜란드인들 저택에서 네덜란드 사람들이 빌리야드를 즐기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렇게 본다면 공식적으로 알려진 1850년 보다 훨씬 이전에 일본에 당구가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많다. 현재와 같은 포켓 빌리어드는 1900년 경에 미국으로부터 들어왔다고 한다.  

여기서 조금 옆길로 빠지지만 나가사키의 데지마가 어떤 곳인지 알아보자. 나가사키 시는 우리나라와 가까운 일본 규슈의 나가사키 현에 있는 나가사키의 현도(縣都)인 도시이다. 일본의 정권을 잡고 있던 도쿠가와 가문의 에도 막부는 강력한 쇄국정책을 취하였다. 그래서 17세기 초반 이후 일본은 오직 조선과의 국교만을 유지하고, 나머지 모든 국가에 대해서는 쇄국으로 일관하였다. 


서구 열강이 식민지 정책을 확대하면서, 동남아로 진출한 유럽 국가들이 일본에까지 와서 통상을 요구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에도 막부는 엄격한 쇄국정책을 취하되, 일본에서 다만 한 곳, 나가사키에 있는 데지마란 섬에 대해서만 외국인들의 입국을 허용하고, 데지마 내에서만 무역을 허용하였다. 이때 데지마에 진출한 유럽인들은 주로 네덜란드 상인들이었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데지마를 통해 서구의 문명과 물품을 일본에 전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데지마가 있는 나가사키 시는 당시 일본 유일의 국제도시였던 셈이었다. 


데지마란 곳은 지금의 나가사키 역 근처에 있는데, 실제로 섬이라고 하기에는 육지와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 지금은 육지와 섬을 나누는 바다를 거의 매립하여 이미 섬이라 볼 수 없지만, 그 시대에도 아마 육지와 섬의 경계가 되는 바다의 폭이 아마 청계천보다도 좁았을 것이다. 좀 과장하자면 훌쩍 뛰어 건널 수 있는 거리였다. 이 데지마 내에는 유럽 상인들이 주택도 짓고, 점포도 열어 일본인들과 무역을 하였다. 데지마는 조금 길쭉한 사각형 모양으로 생겼는데, 넓이는 우리나라 초등학교나 중학교보다 조금 큰 정도이다. 

데지마의 과거와 현재

이렇게 데지마를 통해 일본에 처음 들어온 당구는 곧 전국으로 퍼졌다. 19세기 후반 당시 일본에는 서양 것이라면 무조건 좋은 것이고, 동양 것이나 일본 전통의 것들은 무조건 후진 것이라고 멸시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었다. 그래서 뭘 조금 안다거나 돈 좀 있는 사람들이라면 서양식 풍습과 복식을 따라 하는 것이 큰 자랑거리였다. 


이런 상황에서 서양식 놀이를 즐긴다는 것은 사회적 지위와 신분 과시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당구가 나가사키를 통해 일본에 수입된 이후, 제일 먼저 유행한 곳이 수도인 교토였다. 교토에는 천황과 함께 명문 귀족들이 대를 이어 거주한 곳으로써, 이들은 앞 다투어 서양식 귀족들의 놀이라는 이 게임에 재미를 붙이게 된 것이었다.  


일본에 들어온 당구는 처음에는 포켓볼이었지만, 이후 캐롬 당구가 대세로 된다. 19세기 후반부터 일본은 특히 미국과 외교적으로 가깝게 지내고 왕래도 빈번했다.  그러다 보니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는 유럽보다는 미국의 문화가 많이 수입되고, 그에 따라 미국에서 성행하던 캐럼 당구가 인기를 얻게 된 것이다. 1920-30년대에는 이미 일본 주요 도시에 여기저기서 당구장이 생겨났고, 당구 인구도 크게 증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0-40년대를 무대로 한 일본 영화를 보면 당구장을 무대로 한 장면이 곧잘 나온다. 


동북아시아에서는 일본에 당구가 가장 먼저 들어왔고, 또 당시에는 상당히 인기가 있는 게임이었기 때문에 당구 저변도 우리보다 넓었고, 당구 수준도 우리나라에 비해서는 훨씬 앞서갔다. 1925년에 벌써 일본당구협회를 설립하였으며, 1926년에는 보크 라인 당구대회를 열었다. 이 시기 일본의 당구는 대부분 4구 혹은 3구(스트레이트 레일) 게임이었으며, 공식 시합은 보크 라인 방식으로 하였다. 그러던 것이 점차 쓰리쿠션이 보급되면서 1938년에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전일본 쓰리쿠션 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1940년에는 제16회 보크 라인 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시합을 끝으로 더 이상 보크 라인 게임은 공식 시합에서 사라졌다. 


1965년에는 오가타 코야가 <세계 쓰리쿠션 대회>에 처음으로 출전하여 3위에 입상한다. 그리고 1969년에는 아시아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동경에서 세계 쓰리쿠션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시합에서 오가타 고야(小方浩也)는 2위를 고바야시 노부아키(小林伸明)는 첫 출전하여 4위라는 좋은 성적을 올렸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세계 당구계는 벨기에의 클루망스가 석권하고 있었다. 그는 1963년부터 시작하여 1973년까지 세계 쓰리쿠션 선수권 대회에서 11 연속 우승을 달성하였다. 그런데 이 선수를 일본 선수가 꺾어 버리는 대사건이 일어났다. 1974년 세계 쓰리쿠션 선수권 대회에서 일본의 고바야시 노부아키(小林伸明)가 쿠르만스를 꺾고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이 대회에서 일본의 요시하라 요시오(吉原良男)는 3위를 차지하였다. 세계 쓰리쿠션 대회에서 우승과 3위를 차지한 일본은 명실 공히 쓰리쿠션 경기 분야에서 정상권 국가로 올라 선 것이었다. 

오가타 코야와 고바야시 노부아키

1977년에는 동경에서 두 번째 세계 쓰리쿠션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대회에서는 고바야시 노부아키(小林伸明)가 2위, 요시하라 요시오(吉原良男)가 3위, 코모리 준이치(小森純一)가 4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1980년대 초까지는 벨기에의 클루망스가 세계 쓰리쿠션 계에서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를 제외한다면 여러 명의 일본 선수가 톱 레벨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1982년에는 멕시코에서 열린 <제1회 쓰리쿠션 국가대항전>에서 일본팀이 우승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일본은 쓰리쿠션 분야에서는 항상 세계 정상급의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세계 쓰리쿠션 선수권 대회나 쓰리쿠션 국가대항전에서도 여러 차례 우승하는 등 세계 정상급의 실력을 과시하였으며, 특히 아시아 지역에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러던 일본이 19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당구가 쇠퇴하는 분위기로 접어들었다. 스포츠 분야에서 당구의 위상이 점점 낮아졌으며, 당구 인구도 줄어들었다. 


1980년대까지는 일본에서 당구가 그런대로 인기가 있는 게임이었던 모양이다. 이때까지는 당구를 소재로 한 영화가 몇 편 나왔으며, 소설도 대여섯 편이 된다. 당구 만화는 무려 20여 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스포츠 만화는 애호가들이 없으면 팔리지 않는다. 당구 만화나 소설, 영화가 많이 제작되었다는 것은 당구 인구가 상당히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1980년대 후반 이후 일본에서 당구는 급속도로 쇠퇴한다. 일본에서 1년에 1번 이상 당구장에 가 본 사람의 수는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6-700만 명 정도는 되었다. 이것이 급격히 줄어들어 2015년에는 280만 명 정도에 그치는 것으로 나왔다. 지금은 동경과 같은 대도시에 가더라도 당구장을 찾기가 어렵다. 


또 극히 일부의 선수들을 제외하고는 당구를 치더라도 캐롬 당구는 치지 않는다. 대부분 포켓볼이다. 그 이유는 뭘까? 캐롬 당구는 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상당한 정도로 연습하지 않으면 제대로 치기가 어렵다. 반면에 포켓볼은 초보자라도 쉽게 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당구 인구가 크게 줄어든 지금의 일본에서 포켓볼이 주류를 이루고, 캐롬 당구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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