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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형 Nov 16. 2020

동서고금 당구에 얽힌 이야기들(9)

아홉 번째 이야기: 우리나라 당구의 출발

우리나라에는 이보다 한참 뒤인 1880년대에 들어 당구가 처음 들어왔다고 한다. 어느 책에 보니까 우리나라에는 선교사가 당구를 처음 들여왔다고 쓰여 있던데, 실제로 그랬는지는 좀 의심이 간다. 잘 아시다시피 당구를 치려면 당구대와 당구 큐 등 여러 가지 도구가 필요한데, 당구대란 것이 비싸기도 하지만 운반에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그 당시 당구대의 가격도 비쌌겠지만, 유럽이나 미국에서 조선에까지 당구대를 운반하려면 그야말로 보통 일이 아니었을 테고, 또 돈도 보통 드는 것이 아니었을 터다. 그런데, 그 당시 선교사가 얼마나 부자였는지 모르겠지만, 비싼 경비를 들여 당구대를 들여왔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당구대가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 확인된 걸로는 1884년 9월, 그러니까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한 달쯤 전에 주한 미국 공사가 인천에 당구대를 설치한 것이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에서도 당구가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 모양이다. 외국과의 국교 수립이 확대되면서 많은 외교 공관이 서울에 설치되고, 여기에 주재하는 각 국의 외교관들도 늘어났다. 이들이 취미생활로 당구를 즐김에 따라 당구대를 설치하는 호텔이 늘어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외교 구락부에 당구대가 설치되어 외교관들이 이를 취미생활과 함께 사교장, 비공식 외교의 장소로 활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또 이야기가 잠시 옆으로 빠진다. 외교 구락부라 했는데, 도대체 “구락부”라는 것이 무엇일까? 구락부는 한자로 “俱樂部”라고 쓴다. 이 한자 말을 풀이하면 “함께 즐기는 모임”이 된다. “아! 그러니까 함께 즐기는 모임, 바로 동호회를 구락부라 하는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동호회가 바로 구락부이다. 

그런데 동양사회에는 예로부터 이런 동호회라는 것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았다. 동호회는 주로 서양에서 오래전부터 발달하였는데, 서양에서는 이러한 동호회를 “클럽”(club)이라 하였다. 이 클럽 문화가 일본으로 수입되자, 일본인들은 자기네들도 여러 종류의 클럽을 만들었는데, 클럽이라는 말을 표현할 일본말이 없으니까 서양인들이 말하는 그대로 클럽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일본어에서는 클럽이라는 말의 발음이 어려우니까 이를 “쿠라부”라고 불렀다. 그리고 쿠라부에 해당하는 한자 “俱樂部”를 갖다 붙인 거다. 즉 한자 俱樂部를 우리나라에서는 “구락부”라 읽지만, 일본에서는 “쿠라부”라고 읽는다. 그러니까 간단히 요약하면 클럽→쿠라부→구락부가 된 것이다. 

외교구락부

이런 예가 적지 않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볼까.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로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지만, 옛날에도 전염병이 큰 문제였다. 전염병 중에서도 무서운 것이 콜레라이다. 그런데 콜레라를 우리나라에서는 “호열자”(虎列刺)라고도 한다. 왜 호열자라 할까? 옛날 특히 우리나라나 일본에는 콜레라란 병을 몰랐다. 그냥 단순히 역병이라 알았는데, 서양인들이 오면서 병 이름이 콜레라란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옛날에는 무슨 병인지 몰랐으니까 당연히 병 이름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서 서양인들이 말하는 콜레라를 그대로 따라 “코레라”로 발음하였다. 그리고 코레라에 해당하는 한자 虎列刺로 쓰게 된 것이다. “虎列刺”를 우리나라 식 발음으로 읽으면 호열자가 되지만, 일본식 발음으로 읽으면 코레라가 된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낭만”이란 말이다. 서양에서 “로망”(roman) 이란 말이 들어왔지만, 그때까지 일본에는 로망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었다. 그래서 로망이라는 단어를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발음과 똑같은 한자 “浪漫”으로 표기하였다. 이 일본어 단어가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수입되어, 우리나라 발음 “낭만”이 된 것이다. 즉 한자로 浪漫이라 쓰고,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낭만으로 읽지만 일본식 발음은 로망이 된다. 


이야기가 너무 옆길로 빠졌던 것 같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우리나라 처음으로 당구대를 설치한 사람은 순종 임금이다. 순종은 1912년에 일본으로부터 구입한 2대의 옥돌로 만든 당구대를 창덕궁에 설치하여 당구를 즐겨 쳤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의 취미를 가지고 뭐라 하긴 좀 그렇지만 1910년에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으니, 나라를 빼앗긴 지 얼마나 되었다고, 임금이란 사람이 당구나 치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젠 임금이 할 일도 없어졌는데 당구나 치지 뭘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창덕궁에 설치된 당구대와 점수판

순종 임금 이야기가 나온 김에 또 이야기가 좀 옆길로 빠지지만,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후, 나라를 빼앗긴 임금이라 하여 왕실에 대해 측은한 마음을 갖거나 동정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또 그 후 일제로부터 얼마나 많은 박해를 받았을까 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갖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듯하다. 그럴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나라를 빼앗긴 제일 큰 책임은 뭐라 해도 그 당시 절대적 권력을 가졌던 왕에게 있다. 그리고 일제에 나라를 뺏긴 후에도 일반 백성들이나 고생했지, 임금을 비롯한 왕실은 아주 잘 먹고, 잘 살았다. 일제는 그들을 극진히 대접하였다. 


순종이 당구를 즐겨 거기에 푹 빠져 있으니까 아버지인 고종도 호기심이 생겼던 모양이다. 아들에게 질세라 순종이 당구대를 들여온 1년쯤 지나 고종도 거처인 덕수궁에 당구대를 설치하였다. 실제로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누가 당구를 가장 먼저 친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순종 이전에 당구를 친 우리나라 사람이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순종이 우리나라 제1호 당구인인 셈이다. 그리고 대를 거슬러 올라가 그의 아버지인 고종이 제2호 당구인인 셈이고. 


그러면 순종이나 고종의 당구 실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기록에 따르면 순종의 당구 실력은 60-70점 정도였다고 한다. 당구 60-70점? 이건 너무 초보자 수준이다. 집에 당구대를 2대나 설치하고 맨날 당구 치는 사람이 60, 70점밖에 안되다니, 너무 한심한 수준이다...라고 많은 분들이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지금은 우리가 1개를 치면 10점, 그러니까 60점을 친다면 빨간 공 6개만 치면 되지만 이 때는 1개가 1점이었다. 즉 60점이라면 60개를 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뭐? 60-70개 씩이나? 그러면 지금의 600-700에 해당하는데, 완전 초고수급 아닌가? “ 또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도 아니다. 이때의 당구 게임은 4구 게임으로서 요즘은 우리나라에서 거의 치지 않는 소위 “요시 다마”이다. 그러니까 붉은 공 2개만 치는 것이 아니라, 붉은 공, 흰 공 가릴 것 없이 수구로 다른 3개의 공 가운데 두 개 이상만 맞추면 되는 게임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요시 다마는 빨간 공-흰 공 2점, 빨강 공-빨간 공 3점, 3개 모두 맞추면 5점으로 계산하지만 당시는 일본식 룰로서 무엇을 맞추던 무조건 1점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계산해보자. 당시 70점이라면 70개를 쳐야 하니까, 지금 우리나라 요시 다마 식으로 카운트하면 아마 200점 정도의 점수가 될 것이다. 그런데, 당시는 당구 장비가 지금보다 훨씬 낙후되어 있었으므로, 요시 다마 200점을 치기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실력으로 환산한다면, 순종은 아마 한 300-400점쯤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순종

그런데 지금 “요시 다마” 이야기가 나왔으니 잠깐 옆길로 빠져 여기에 대해 알아보자. 지금은 흰 공, 붉은 공을 구분 없이 쳐도 되는 요시 다마는 거의 사라진 것으로 보이는데, 내가 당구를 처음 시작하던 1970년대는 당구는 무조건 요시 다마부터 시작하는 것이 거의 불문율이다시피 했다. 당구를 처음 시작하면 30점을 치게 되는데, 이 때는 치기 쉬운 요시 다마부터 시작한다. 한 50점 정도까지는 요시 다마를 치다가 70-80점으로 다마 수를 올리면서 붉은 공만 쳐야 하는 속칭 “아까 도리”로 전향하는 것이었다. 나이 든 분들은 “아까 도리”, “요시 다마”라 하면 “맞아! 그땐 그런 말을 사용하였지”, 하고 옛 생각을 떠 올릴 것이다. 


그런데 왜 붉은 공만을 치는 게임을 왜 “아까 도리”, 흰 공, 붉은 공 가리지 않고 치는 게임을 “요시 다마”라 하였을까? 나도 “요시 다마”란 말이 하도 오래되어 이 글을 쓰면서 잘 기억이 나지 않아 기억을 되살리는데 한참 힘이 들었다. 인터넷을 찾아보아도 그런 말을 찾기 힘들다. 혼자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마 “아까 도리”는 일본말 “아까 도리”(赤取り)에서 온 듯하다. 일본말 “아까 도리”란 “빨간색만 갖는다.”라는 뜻이다. 일본에서는 이 방식의 게임을 속칭 “아까 아까”(赤赤), 즉 “빨강 빨강” 게임이라고 한다. “요시 다마”는 아마 일본어 “요쓰 다마”(四つ球)가 와전된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요쓰 다마”란 말 그대로 “4구”란 뜻이다. 일본에서는 4구라 하면, 보통 붉은 공, 흰 공 구분 없이 치는 당구를 말한다. 넓은 의미에서는 아까 도리도 공 4개로 게임을 하므로, 요쓰 다마에 포함된다 할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그런데 순종이나 고종이 당구를 즐겼다고 하면 도대체 누구와 당구를 쳤을까? 순종이 우리나라 제1호 당구인이라면 당연히 당구 칠 상대가 있을 리 없다. 당구를 늦게 배운 아버지 고종과 쳤을까? 부자간에 당구를 치는 것도 좀 그렇다. 괜히 아버지에게 당구를 이겼다간 야단만 맞을지도 모른다. “상감은 그렇게나 이 아비에게 이기소 싶소?”라는 말을 듣는다면 순종은 당구 칠 마음이 싹 달아날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고 해서 혼자서 당구를 치는 건 정말 재미없어 못 친다. 당구장에서 연습 당구만 친다고 할 때 정말 그보다 싱거운 것도 없다. 그것도 하물며 자기 집에서 설치된 당구대에서 친다면 말할 필요도 없다.  

고종

당구란 뭐니 뭐니 해도 당구 게임비가 걸려있는 게임을 해야 승부심도 생겨나고, 짜릿짜릿한 재미가 있다.  순종은 일본인인 종로경찰서장과 자주 게임을 했다고 한다. “아니, 한 때 왕이었던 사람이 고작 경찰서장 하고 당구를 친다고?”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쩌랴. 당구는 치고 싶은데, 상대가 없으니까...


당시 조선 사람으로서 이름이 <키노시타 초키치>라는 당구 고수가 있었다고 한다. 한국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 사람은 당구를 치면서 중국과 만주, 일본 등을 떠돌아다녔다고 한다. 굳이 말하자면 “방랑당객”(放浪撞客)이라 해야 할까? 하도 당구를 잘 친다고 알려져, 순종도 한번 그를 불러 함께 당구를 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순종이 대궐에 당구대를 두고 당구를 즐겼다면 또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도대체 당구대를 어떻게 관리하였을까? 아시다시피 당구대란 것이 조금만 관리를 않으면 엉망이 되어 버린다. 당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집에 공간적 여유가 있더라도 당구대를 가져다 놓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관리의 어려움 때문이다. 내가 다니던 직장에서도 몇 년 전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당구대를 몇 대 설치하였지만, 그 후 관리가 어려워 당구대가 엉망이 되고, 이용하는 사람이 점차 줄었다. 지금도 당구대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당구대뿐만 아니라 큐도 매일 손질해하고, 공도 항상 깨끗이 닦아야 한다. 상당한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이런 일들을 궁녀나 내시들이 제대로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 당구를 잘 치는 것으로 알려진 전상운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이 사람이 순종의 당구대의 관리 책임을 맡아, 수시로 궁에 드나들면서 당구대 및 도구를 관리하였다고 한다. 또 이 사람은 상당한 당구 고수로서 순종에게 당구 교습을 하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을사오적(乙巳五賊)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매국노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는 이완용도 당구를 즐겼다고 한다. 그도 집에 당구대를 설치하여 당구를 즐겼고, 집에 당구대가 있으니 아들, 조카 등 일가친척도 당구를 즐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시대 당구: 드라마 야인시대와 미스터 선샤인

이렇게 왕가나 고관대작들이 즐겨하던 당구가 192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점차 일반에게도 확대되었다고 한다. 종로와 낙원동, 인사동 일대에 속속 당구장이 생겨 당구의 저변이 조금씩 넓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일반 백성들이 당구를 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내고, 부자 집 자재의 한량이나,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신식 생활을 하게 된 일부에 그쳤다. 그러고 보니 지금도 종로 3가를 중심으로 종로 일대에 당구장이 많이 있는데, 종로의 당구장은 이렇게 긴 역사가 있는 모양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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