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희 Dec 09. 2022

읽는 것에서 그치지 않기를

<자폐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읽고



한낮 산책로는 한적했다. 여름이 익어가는 길가엔 작은 들꽃이 만발했고 가끔 불어오는 바람과 그늘은 땀을 식히기에 좋았다. 느긋한 산책을 즐기던 그때 앞장서 걷는 성인 남성이 눈에 띄었다. 하의만 병원복을 입은 모습부터가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뒷모습뿐인데도 뭔가 ‘다르다’는, ‘촉’이라고 부르는 뾰족한 감정이 이유와 근거를 따지지 않고 예리하게 솟았다. 팔과 어깨를 일부러 크게 흔드는 듯한 걸음걸이와 알 수 없는 말을 크게 중얼거리는 모습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 같았다.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주는 불안은 곧 위험하다는 느낌으로 변해서 최대한 거리를 두며 걸었다. 하지만 이내 거리가 좁혀져서 그분을 앞지르게 되었다. 그분을 뒤에 두고 걷는 것도 어쩐지 내키지 않아서 속도를 늦춰 나란히 걸으며 뒤돌아갈지 빠르게 앞질러갈지 고민하던 그때 그분의 말이 정확히 들렸다.

”카메라. “

그 말에 저만치 앞장서 걷던 여자 어르신의 대답이 돌아왔다.

”라디오. “

혼잣말이 아니었다. 아들과 어머니 사이로 보이는 그분들은 끝말잇기를 하며 산책길을 즐기는 중이었다. 아들로 보이는 성인 남성의 목소리와 말투는 어린아이와 같았지만 이미 여러 번 반복한 듯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바로바로 다음 단어가 오고 갔다. 라디오 다음은 오디오, 오디오 다음은... ’오’로 시작하는 게 중복되면서 패턴이 무너졌는지 그 남자분은 처음으로 망설였다. 옆에서 듣던 나도 덩달아 긴장되어 숨죽여 대답을 기다렸다. ”어, 어, 음... “ 뜸을 들이던 남성분이 대답했다.

”오작교“

그 자리에 우뚝 서 나만큼이나 대답을 기다리던 어르신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 남성을 칭찬했다. 다 큰 어른의 대화라기보다는 어린 아들과 엄마의 놀이 같았다. 뒷모습에서 처음 느꼈던 뭔가 다르다는 촉은 틀리지 않았지만 과격하거나 위험할까 봐 걱정했던 내 짐작은 틀렸다.


마침내 그분들을 앞질러 걸으며 잠깐이었지만 혼자 오해하고 두려워했던 게 무척이나 미안했다. 곧이어 부끄러움도 몰려왔다. 그즈음 나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환호하며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와 사람들을 비판하고 변화를 촉구하기 위해 내가 할 일을 고민하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산책길에 만난 그분도 자폐스펙트럼의 어느 한 지점에 포함됐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나는 우영우를 바라보듯 그분을 호의적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자동반사적으로 판단이라는 걸 했다. 불과 3-4초 만에 이쪽인지 저쪽인지를 구분해버린 것이다. 내가 우영우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그가 똑똑하고 귀여웠으며 예상 가능한 범위의 행동만 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우영우가 3화 에피소드에 등장했던 남성 자폐인처럼 큰 몸집에 예측 불가능한 행동을 했더라면 변호사가 된 설정조차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이 모든 판단과 불안이 두려움으로 바뀌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10여 초 정도였다. 이 책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그저 한 번 쓱 훑어본 후“ 쉽게 판단하고 그에 걸맞은 행동을 요구한다. 그런 식으로는 그 누구도 제대로 이해받을 수 없으며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없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걸 잘 알면서도 자동반사적으로 작동하는 판단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낯설어서 오해하고 모르기에 쉽게 두려워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그 간극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고 싶은 절실함에서 읽기 시작했다. 800쪽이 넘는 벽돌책이지만 자폐와 관련된 수많은 사람과 사건을 만나다 보면 금세 끝이 보인다. 드라마나 책을 통해 자폐인을 만나는 것과 한 공간 속에서 지내보는 것은 또 다른 의미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에 등장하는 도널드나 아치 캐스토가 노년에 누린 환경은 지금 당장 요원하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적어도 뒷모습만으로 판단하고 구분 짓는 나 같은 사람이 잠시나마 판단의 작동을 멈추는 계기는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작가의 이전글 슬렁슬렁 산책하듯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