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by 이재현

나는 매월 혈압을 체크하고 혈압약을 처방받으러 친구가 원장인 소아과 병원을 방문합니다. 그곳에서 손주와 함께 병원에 오는 할아버지들을 봅니다. 평촌에 사는 내 친구는 일주일에 두 번 손주를 돌보러 잠실에 사는 아들 집에 다닙니다. 아들 부부가 모두 일을 나가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는 길에서나 공원에서도 할아버지와 손주가 함께 있는 모습들을 많이 봅니다.


나에게 할아버지는 낯선 사람입니다. 친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에 돌아가셨고, 외할아버지는 내가 갓난아기일 적에 돌아가셨답니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와 함께한 추억이 없습니다. 어릴 적 나에게 상상되었던 할아버지는 긴 수염에 한복을 입고 손에는 기다란 곰방대를 들고 있는 엄한 모습입니다. 이런 내가 조금 있으면 할아버지가 됩니다.


딸이 곧 엄마가 됩니다. 딸은 지금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으며 직장에 나가고 있습니다. 엄마가 된다는 기쁨도 크지만 직장에 다니며 육아를 해야 한다는 걱정도 큽니다. 아내는 나에게 미국에 가서 딸의 육아를 도와주라 말합니다. 딸도 밖에서 일하는 엄마보다 집에서 살림하는 아빠가 와서 도와주는 것에 더 긍정하는 것 같습니다. 아내는 벌써부터 손자에게 그림책 읽어주는 할아버지가 멋져 보인다, 꼭 우리말을 가르쳐야 한다는 등 손자에 대한 자신의 욕구를 나에게 요구합니다.


지난주에 종영된 ‘청 준기 록’이라는 TV 드라마를 매우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특히 주인공인 손자와 할아버지의 관계가 나에겐 인상적이었습니다. 모범생인 형에 비해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손자는 가족 중 유일하게 할아버지의 이해와 지지를 받습니다. 연기대상 수상소감에서 항상 자기를 믿어주고 지지해 준 할아버지께 감사드린다는 말에 가슴이 울컥하였습니다. 오늘의 결과가 있기까지 할아버지의 관심과 사랑이 제일 큰 용기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책 ”강의‘의 저자 고 신영복 교수님은 붓글씨를 매우 아름답게 쓰시는 분으로도 유명하셨습니다. 교수님은 어려서 할아버지로부터 붓글씨와 한문을 배웠다고 합니다. 우리 아이들도 할머니와 함께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아내가 직장에 나갔기에 아이들은 할머니와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할머니의 보살핌 안에서 자란 아이들에게는 할머니와 함께한 좋은 추억들이 많아 보입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금에도 아들은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할머니라고 말합니다. 나도 어머니보다는 할머니와 함께한 시간이 많았고, 아내도 자라면서 할머니는 항상 자기편이었다고 말합니다. 우리 가족 모두의 삶에는 할머니의 사랑과 정신이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할아버지도 지금의 손자와 같은 유년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침 먹고 나가서는 시간 가는 줄 모르며 온종일 뛰어놀다 해 질 녘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던 기억들입니다. 살면서 문득문득 그 시간을 그리워만 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호기심 많고 천진난만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 일을 손자가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손자가 학교에서 일찍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공부가 재미없었답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밖에서 한참을 재미있게 놀고 있는데 저 멀리서 담임 선생님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급하게 말했습니다. ”예야, 저기 너희 선생님 오신다. 빨리 숨어라! “ 손자가 더 다급해서 말합니다. ” 할아버지 빨리 숨으세요! 선생님에게 할아버지 죽어서 집에 가야 한다고 말했단 말이에요~“


손자에게 할아버지는 ’언제나 내 편‘입니다. 할아버지에게 손자는 잃어버린 유년으로 돌아가 순수한 나를 만나는 길입니다. 할아버지와 손자는 상부상조하는 항상 유쾌한 관계 같아요.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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