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규네 홈스쿨링 이야기 26
남편: 준규야, 흙장난 그만하고 우리도 가자~.
준규: (대답 없음) …….
남편: 준규야, 저기 끝까지 가면 타조도 있대.
준규: (들은 척도 하지 않음) …….
남편: 너 계속 그럴 거면 혼자 있어. 아빠는 그냥 엄마랑 간다.
준규: (안들리는 듯함) ……
남이섬 초입부에서 5분도 채 걷지 못하고, 한 시간이 넘도록 바닥에 꼼짝 않고 앉아 흙장난만 하는 준규를 보며 남편은 슬슬 자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준규가 34개 월쯤 되었을 때의 일이다. 여느 부모가 그렇듯 아이 에게 이 세상에 얼마나 신기한 것들이 많은지 보여 주고, 직접 느끼게 해주고 싶은 기대에 부풀어 주말 나들이를 나섰지만 이 불편한 대치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겨우 5분이지만 난생처음 배 를 탄 아이의 반응이 궁금해서 들떠 있었고, 섬 안에 있는 타조, 청설모, 거위, 오리를 보면 얼마나 신기해할까 상상하며 남편과 나는 아이보다 더 설렜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배에서 내려 몇 미터도 못 가서 아이는 모래와 낙엽에 정신이 팔리고 말았다. 온갖 회유와 엄포도 통하지 않았 다. 선착장 근처에서 오리들에게 옥수수 알갱이를 주는 아이를 겨우 꾀어 움직인 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흙장난만 하고 있는 아이가 야속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남편에게 준규 고모와 먼저 섬 안쪽으로 가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평소 나를, 너무 아이한테만 맞춰주는 유별난 엄마라고 생각하기도 했던 남편은 답답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냥 울든 말든 강제로 끌고 가면 되지, 어떻게 다 맞춰주냐!”
준규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나라고 좋을 리 없을 텐데 화를 내는 남편이 속 좁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결국 난 자제심을 잃고 준규 편을 들고 말았다.
“타조를 보여주고 싶은 건 준규 아빠 바람일 뿐이지,
그걸 보여주겠다고 끝까지 직행하자는 게 어른 욕심 아니고 뭐야?
왜 섬 끝까지 가야 하 는데?
준규를 위해서?
준규 아빠를 위해서가 아니고?”
갑자기 분위기가 냉랭해지고, 남편은 결국 타조가 있는 섬 끝을 향해 먼저 걸음을 옮겼다. 남편은 가다 멈춰 아이와 나를 되돌아보기를 여러 번 반복했지만, 준규는 여전히 흙장난에 빠져 아빠가 가든 말든 상관도 하지 않았다. 결국 20~30분 정도 흙장난을 더한 후에야 청설모도 보고 타조 구경도 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생후 18개월이 지나면 부모 말을 순순히 따르는 아이는 없다고 한다. 다만 기질에 따라 조금 더 순종적인 아이가 있거나, 아니면 부모의 강압 적인 태도에 대한 경험 때문에 눈치를 보며 따르는 아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살이 되면 아이는 자기 자신을 의식하기 시작하고, 자기가 선택하고 싶어 하며, 한 사람의 인간이 되려고 한다.’★ 엄마 아빠의 마음을 몰라주어서도 아니고, 부모를 화나게 하려는 건 더더욱 아니다. 그저 본인이 선택한 것을 충분히 하고 싶은 것, 그뿐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아이와 부모 사이에 벌어지는 미묘한 신경전이 주도권 싸움으로 번지기까지 한다. 30분? 길면 한 시간? 천천히 가도 될 것을……. 남편이 야속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도 아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버거운데, 남편까지 달래야 하는 그 상황이 힘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세상의 중심이 자기였던 아이는 어느덧 열세 살이 되었다. 어느 날인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들 녀석이 내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최근에는 자주 그랬던 것 같다. 문득 예전 생각이 나서 남이섬 이야기며, 길도 아닌 야산으로만 돌아다니던 이야기를 아이에게 들려주었다.
준규: 정말? 내가 그랬어?
엄마: 응, 걸음마 떼고부터는 유모차에 순하게 앉아 있는 법이 없었고, 위험해서 손을 잡으면 뿌리치고 화내기 일쑤였어. 그런데 이렇게 커서 엄마랑 다정히 손을 잡고 걷는 날도 다 있네
빙그레 웃으며 이야기를 듣던 아이가 내게 말했다.
준규: 나 같은 아들을 키우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그런 걸 다 기다려줬어? 난 엄마 아들로 태어난 게 참 다행인 것 같아.
엄마: 오~ 그래도 아들이 이렇게 알아주는 날이 오네.
남이섬까지 와서, 동네 놀이터에서도 할 수 있는 흙장난을 하는 아이를 기다려보자고 마음먹은 건 언제부터였을까? 정확한 시기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그렇게 마음먹게 된 건 준규가 걷기 시작한 때부터였다.
준규는 평평하고 안전한 보행로를 놔두고 야산 구릉을 헤집고 다니기 일쑤였다. 편한 길을 놔두고 위험해 보이는 길로만 가려 하는 아이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 아이를 말리다 폭발해버릴 것 같은 날도 많았다. 여느 부모가 그렇듯 “안 돼!”라는 말로 엄포를 놓기도 해보고, 보행로로 걷자고 조곤조곤 설득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야산으로 내달리는 아이를 어쩔 수가 없어 포기하고 따라가기 시작했다.
아이 행동에 대한 공감이나 이해라기보다는 포기에 가까웠다. 그런데 내가 말릴 때마다 반복되는 “왜요?” 라는 아이의 질문에 나조차 마땅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보행로가 아닌 산길로 걷는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저 내가 편하게 따라가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아이가 순순히 내 손을 잡고 따라왔더라면 나 편한 길로만 아이를 이끌었을 것이고, 아이에게 내가 걸어온 길만큼만 보여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니 포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아이를, 어쩔 수 없이 따라가주었던 것이 오히려 다행인 것 같다.
아이는 일상의 경험을 통해, 궁금한 것이 있을 때 조금은 험해 보이고 인적이 드물더라도 일단 가보려 하는 삶의 태도를 배웠을지도 모른다. 또한, 남들이 편하고 안전하게 닦아놓은 길을 따라가기보다는 자기만의 호기심을 따라 나아갈 수 있다는 긍정적인 경험을 했을 수도 있다. 물론 아이가 산길로 걸었다는 것 하나로 무슨 그런 확대 해석이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사소하게 지나칠 수 있는 그 일상들이 모여 준규의 상상력의 원천이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준규는 강제로 끌고 가려 하면 할수록 반대 방향으로 더 강하게 튕겨 나가는 아이였다. 그래서 혼내기보다는 오히려 이해시키는 방법을 택해야 했다. 준규를 위해서 택한 육아 방식이기는 했지만, 나 스스로에게도 왜 그 렇게 해야 하는지 이유가 필요했다. 그래서 책을 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준규의 이해되지 않는 행동들에 대해 그 이유를 찾고 싶었다. 쉬운 육아 서적부터 시작해서 교육학 전문 서적들까지 읽어나갔다. 책을 보면 볼수록 아이의 행동들 뒤에 숨은 이유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엄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준규네 홈스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