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세월 그 누구가 잡을 수 있나요, 일단은 보내줍시다.
이유 없이 센치해지는 연말이다. 각자만의 방법으로 연말의 휴식을 취하는 때인데, 나만 그런건지 괜히 감상에 젖는다. 지난 한 해를 어떻게 보내왔던가, 내가 새해에 세운 계획들은 잘 지켜졌는가 등등의 생각이 12월 중순 이후로는 머릿 속에서 잘 떠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올해도 역시나 아쉽다.
작년부터 회사에서 작성하는 업무 KPI의 형식을 빌려 나도 생활계획을 정의하고, 그에 대한 목표치 실행계획을 수립했었다. 요새 트렌드는 피드백을 자주하는 것이니만큼, 중간중간 목표 점검도 하고 수정도 해 가려고 했었다. 물론 제대로 된 기록을 위해 플래너도 하나 마련해 두고.
정말이지 쉴새 없이 바빴던 한 해였다. 코로나 탓에 기존에 적당히 준비해서 가능했던 해외출장도 격리면제까지 받아가며 그야말로 '빡세게' 준비해서 다녀왔고, 그 사이에 하던 업무도 바껴서 적응하고 또 꾸역꾸역 해 나가느라 고생을 했다. 지나고 보니 '할 만한' 고생이었다. 고생으로 쌓인 경험치는 내 안에 그대로 쌓이고, 그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내 스스로 레벨업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다만 그 때문인지 몰라도, 세웠던 계획을 제대로 해 나가는데 큰 지장이 생겼다. 아니 계획이 없는 편이 나았는지도 모르겠다. 데일리 루틴을 세웠지만, 평온한 하루를 보낸다는 가정 하에 만들어져서인지 못 지키는 날이 허다했고, 하려던 운동도 쏟아지는 스트레스와 업무에 우선순위가 밀리기 일쑤였다. 아마 그 지점에서 살짝 좌절이 찾아왔던 것 같다. 달리 말하면 '슬럼프'다.
겪어 본 사람들은 알테지만, 이 슬럼프라는 게 딱히 뭐 어떻다고 정의하기 참 어렵다. 대개 무기력과 한숨을 동반하면서 멍한 상태를 자주 보인다는 게 특징이긴 한데, 이를 풀어내는 방법 또한 천차만별이다. 누구는 운동으로, 누구는 명상으로, 또 누군가는 술로, 드물지만 누군가는 책이나 공부로 풀어내기도 하니까. 그런데, 난 올해 이 슬럼프를 위에 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확실히 떨쳐내지 못했다. 그냥 어느 순간 '놓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그냥 흐름에 맡겨서 의지를 내려놓고 흐르는 대로 흘러보자 했었다. 그랬더니만, '시간'이라는 나룻배가 날 여기까지 태우고 와 주었다.
연말이 되고, 평가시즌이 끝나고 내년에 대한 얘기들이 오가면서 어느 덧 정신이 살짝 돌아온 것이다. 잊고 있던 연초 계획을 다시 들추어 보고, 역시나 '아쉬운 한 해였구나'를 되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서는 다시 노트를 펼치고 펜을 들었다. 올해 예전보다 내가 나아졌다 느낀 점은 바로, 그 작년 계획을 찢어버리지 않고 주욱 훑어보고서 한 줄 한 줄 나름의 반성(Reflection)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반성. 학창시절엔 웬지 이 단어와는 어울리면 안될 것 같은(반성문 따위의..) 느낌이었는데, 이제 와 보니 참으로 필요한 단어다. 단어의 태생적인 한계도 있다. 돌아보고 성찰하겠지만, 되돌릴 수는 없는 그런. 그래도 하나씩 고민하고 생각해 봤다. 생각보단 잘 된 부분도 있고, 역시나 구호에 그친 것들도 많았다. 그래도 그 당시에 이런 생각들을 했었던 내 자신을 떠올려보며 셀프 격려도 했다.
방학 때 큰 동그라미 안에 선을 죽죽 그어 계획을 세웠던 경험, 모두 갖고 있을 것이다. 물론 다 지킨 사람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또 우리는 그 다음 방학에 또 그 계획을 그린다. 어찌 보면 또 안 지킬 것을 알면서도 그린다. 사회에 나와서도 똑같았다. 매년 계획을 세우고, 매년 어기고, 하지만 또 세우고.
새로운 계획을 세울 때 갖게 되는 나름의 기대감과 희망. 이걸 느끼고 싶어서는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고민을 하고 적어내려가는 순간만큼은 적어도 괜찮은 모습의 '나'를 그려가니까 말이다. 그래서 올해 연말도 새해를 얼마 안 남기고 천천히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지나 간 한 해는 이제 놓아주고, 힘찬 새해를 기약하며. 작년보다는 조금 더 현실적으로, 기대감은 조금 낮추면서 내년 연말에는 덜 아쉬워 할 수 있도록. (그럼에도 분명 다 못 지킬 것 같고, 또 많이 아쉬워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