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즐길만한 게 필요하다. 집 근처 문화센터 수업을 뒤져본다. 온라인 강의도 찾아본다. 그리고 결제 완료. 생후 6개월의 누워만 있는 아이가 혹여 심심할까 유아마사지 수업을 결제했다. 아이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면서 체육활동, 오감놀이, 동화 구연 등등 문화센터의 모든 강의들은 빠르게 결제됐다. 즐길 거리를 찾기 위한 마지막 단계는 늘 결제였고 아이를 위해서라면 이 과정이 물 흐르듯이 흘러갔다.
이 당연한 과정이 엄마들의 즐길 거리를 위해서는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취미의 시작이 결제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엄마들에겐 ‘뭔가 즐길만한 게 필요하다’보다 앞 선 단계가 추가된다.
이 취미가 내게 필요한가?
이 지출이 수입을 발생시키기 위한 전 단계가 아니라 단지 언제 있을지 모를 여가시간을 위해서라는 사실이 먼저 발목을 잡는다.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를 다른 곳에 맡기고 취미를 배우러 나가는 것에 대한 쓸데없는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면, 시작도 전에 포기를 선언할 여지가 충분하다.
‘돈을 들이지 않고 혼자 해볼 수도 있잖아?!’라고 스스로 질문한다. 이 질문으로 혼자 망망대해에 둥둥 떠서 허우적거리는 동안 즐거움보단 피곤함을 더 많이 느끼게 된다면, 시작이라기 보단 '시도'에 그칠 확률이 높아진다.
엄마들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시간이라서, 돈을 들이지 않은 더디고 더딘 배움의 과정은 제자리걸음을 하다 결국엔 지쳐 쓰러질 것이 분명하기에. 아이도 엄마도 새로운 영역에 들어가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이러쿵저러쿵해도 결제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나를 위한 투자가 부담스러운 엄마에게 추천하는 취미.
가족을 위한 천연화장품 만들기!
나를 위한 투자가 어색하고 부담스러운 엄마라면 '쓸모 있는 것'을 취미로 선택할 때 스스로를 설득하기가 쉬워진다. 이 쓸모가 가족을 향해 있다면 설득이 조금 더 수월하다. 특히 아이와 관련된 것이라면 ‘나만을 위한 사치’라는 압박이 줄어든다. 그렇게 나는 기저귀 발진이 심했던 첫째 아이를 위해 천연화장품 만들기에 입문했다.
얼굴에 로션 하나 바르는 것도 귀찮고 화장품에 별 관심도 없는 내가 화장품 만들기를 배운다는 것은 나의 배움이 아이를 위한 일이라는 명분을 쥐어주었다. 꼭 필요한 배움이고 하고 싶다는 단계를 넘어 강의까지 알아봤다면 드디어 마지막 단계인 결제가 남아있다.
기본만 배우는 건 7만 원. 초기 비용이 낮아 쉽게 그들의 상술 속으로 진입하기에 나쁘지 않은 가격이었다. 기초에서는 ‘스킨, 로션, 립밤,’ 등의 기본 화장품을 배운다. 다음 단계를 결제하면 ‘기능성 보습로션, 아토피에 좋은 크림, 천연연고 ’를 배울 수 있다. 아니, 이건 정말 필요한 건데?! 가볍게 모든 단계를 뛰어넘고 또다시 결제가 남는다.(+13만 원) 그 뒤로 계속해서 꼭 필요한 것들이 등장하는 바람에 나도 모르는 새에 마지막 단계에 서있게 된다. 마지막 단계까지 오면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는 시험이 남아있는데, 이것마저도 비용이 든다. 여기까지 왔는데 자격증을 따지 않는 것은 괜히 마무리를 짓지 않는 것 같은 찝찝함을 남긴다. 그렇게 자격증 발급까지 모든 단계를 계산해보니 총 60만 원 정도가 든다.
헉. 60만 원어치 화장품을 사는 게 낫지 않을까?
또다시 결제의 문턱에 서서 기회비용을 둘러싼 여러 회로가 작동됐다.
보통 6개월 정도의 기간이 걸린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감안했을 때 총비용 60만 원을 6개월로 나누면 한 달에 10만 원. 10만 원을 30일로 나누면 하루에 3300원? 에게?! 커피 한잔도 안 되는 금액에 도달하자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진다. 커피 한잔 안 먹지 뭐! (물론, 커피는 내내마셨다.)
천연 화장품 만들기는 각 재료의 성분과 효능을 파악하는 암기가 접목된 활동이라 어느 정도 배움에 대한 갈증도 해갈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천연 성분이 뿌리에서 추출되는지, 추출 방법은 압착형인지, 따듯한 온도에서 추출되는지 차가운 온도에서 추출되는지 , 어떤 효능을 갖추고 있는지. 피부의 표피까지 작용하는지 진피까지 작용하는지 등등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새로운 지식이 쌓이는 것 같아 괜히 뿌듯해지기까지 했다.
제조 과정은 또 얼마나 재밌는지 여러 재료를 조합하고 가열하고 식히고 섞는 과정들이 실험실 안 과학자가 된 것 같았다. 한 번도 이과 인적 없던 문과 출신으로서 서른이 넘어 맛 본 새로운 세계는 짜릿할 정도였다.
전문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기성 제품에 대한 신뢰가 콘크리트만큼 단단했기에 화장품을 만드는 과정이 신기하고 재밌었을 뿐 딱히 효과를 기대하진 않았는데, 아이의 발진이 사그라들었다. 세상에! 아토피로 발전할 가능성이 짙다고 진단하신 의사 선생님이 진단을 바꾸실 정도로 아이의 피부가 호전됐다. 역시 배우길 잘했어! 야호. 이제 내게도 여가시간을 즐겁게 보낼 취미가 생겼다!라고 환호하면 좋겠지만,
그렇진 않았다.
반가웠던 수업료의[재료비 포함]이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수업이 끝나고 이것이 나의 취미가 되기 위해서는 필요한 재료와 도구를 구입해야 했는데 초기 재료구입비용이 약 백만 원.... 산 넘어 산이다. 나는 또 결제의 벽에 부딪혔다. 계산기를 꺼냈다. 아무리 두들겨도 세 자릿수를 벗어나지 못하는 계산기를 바라보며 알게 되었다. 내가 굉장히 고급 취미에 발을 들였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