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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솔 May 11. 2022

입양의 날

_ 내가 부끄러웠던 이유는?

오늘(5월 11일)은 입양의 날이다. 올해가 17회 기념행사를 한다는 것을 보면, 그리 생긴지 오래된 기념일은 아닌 것 같다. (솔직히 기념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기사을 보니, 지난해 입양된 아동은 총 415명이고, 이 중 해외입양된 아이는 189명으로 45.5%라고 한다. 지난해 입양된 총아동수가 그 전해에 비해 늘어난 것인지, 이 중 해외입양의 비율은 전해에 비해 줄어든 것인지는 모르겠다. 찾아보면, 알 수도 있겠으나, 굳이 찾아보고 싶지는 않다.


2011년 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해외출장을 가면서, 헬싱키 공항을 경유하였었다. 헬싱키 공항은 처음이어서, 비행기 탑승시간을 기다리며, 공항 구경차, 공항을 돌아다녔다. 그리 큰 공항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어딘가에서 한국말로 ‘엄마’를 부르며 우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국 아이 목소리가 반갑기도 했고, 헬싱키 공항에서 우는 아이가 걱정되기도 하서, 울음소리를 따라가 보았다. 그곳에서 내가 본 광경은, ‘엄마’라는 발음을 정확히 할 수 있는 한국 아기가 (아마 두 살쯤되었을 것 같았다.) 울고 있었고, 선해 보이는 백인 부부가 한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아기를 달래는 모습이었다. 순간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아기는 지금 한국에서 해외로 입양가고 있는 것이구나. 그리고 이 선해보이는 백인 부모가 양부모님이 되겠구나. 그리고 이 양부모는 한국말을 전혀 모르고, 그래서 한국말로 ‘엄마’를 부르며, 우는 아기를 아기는 전혀 모르는 언어로 달래고 있구나. 그래서 아기는 달래지지않고 울고 있는 것이겠구나. 두 살 정도의 나이에 어른도 힘든 장거리비행을 하려니, 힘들어서 우는 것이겠구나. 내가 옆에 가서 아기를 안고, 한국말로 달랜다면, 울음을 그칠 수도 있겠구나.


그런데, 나는 그 때, 아기 옆으로 가지 못하고, 뒤돌아서 아직 탑승시간까지 한참 남은, 탑승구로 걸어 돌아왔다. 왠지 내가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밝히고 싶지않았다. 정확히는 순간적으로 내가 한국사람이라는 것이 부끄러웠다. 부끄러웠던 이유는 지금도 모르겠다. 그 아기를 특별히 아주 불쌍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였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한국에서는 부모와 살 수 없는 아기라면, 해외 입양을 통해서 좋은 부모를 만날 수도 있고, 그것은 아기에게 좋은 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떤 이유로 친부모와 함께 살 수 없게 된 것은 안 된 일이지만, 해외 입양 자체를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백인 부부는 정말 선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난 당시에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이 부끄러웠다.


2021년 한국의 출생자수는 26만 3천명이고, 사망자수는 31만 7천명이었다고 한다. 사망자수가 출생자수보다 많고, 인구는 줄고 있다. 그리고, 작년 입양아동의 45.5%는 해외입양이 되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이 사회구성원 모두가 함께 책임지는 구조가 아닌, 아이를 낳은 부모가 전적으로 책임져야하는 구조에서는 출생자수는 아마도 계속 줄어들 것이고, 입양아동수는 늘어날 것이고, 해외입양아동수도 늘어날 것이다. 출생률이 떨어지는 원인을 ‘젊은 세대의 알 수없는 책임’으로 돌리지않고, 소위말하는 지금의 어른들이 만든 한국사회의 구조가 ‘육아를 사회 모두가 책임지는 구조가 아닌, 부모가 전적으로 책임지는 구조로 만들어진 바람에, 부모의 부와 지위가 세습되는 구조’ 되었기때문임을 인정하는 것이 입양의 날을 맞아서 이야기되어야할 내용이 아닐까? 그래야 사회가 한걸음 앞으로 나갈 수 있지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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