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솔직히 말할 수 있는 아이가 부럽다.
[이 글은 지난 5월에 써놓았던 글입니다.]
“부러워. 정말 부러워. 부러워 죽겠다.”
아침에 소풍간다고, 가방을 싸고 있는 첫째를 따라다니며, 둘째가 말하고 있었다.
첫째는 중1, 둘째는 초4이다. 최근 몇년간 코로나 덕분에 두 아이 모두 소풍다운 소풍을 가지 못했었다. 그런데, 중학생이 된 첫째가, 소풍을, 그것도 롯데월드로 가게 된 것이다. 이동방법도 단체버스가 아닌, 삼삼오오 모여서 지하철로 간다고 하니, 둘째 입장에서는 부러울 수 밖에 없다. 부러운 감정을 숨기지않고, 말하는 둘째를 보며, 나와 아내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 아이들은 무언가 부러운 것이 있으면, 솔직히 말하는 편이다. 특히 둘째가 그렇다. 친구집에 놀러 갔다오면, 부러웠던 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다. 더 넓은집, 예쁜 책상, 침대, 오락기 등등. 부러운 것은 끝이 없다. 첫째는 중학생이 되더니, 말이 줄어서, 둘째만큼 부러운 것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부모입장에서, 아이가 부러워하는 것을 못해주는 것은, 뭐랄까, 이유모를 미안함이 생기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이렇게 부러움을 말하는 아이에게 맞장구를 쳐준다. ‘와~, 그 친구는 정말 좋겠다.’라구.
부러움을 표현하는 것은 건강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 부러움을 상대방에대한 ‘비꼼’으로 표현하고, 상대방에게서 나보다 못한 점을 찾아내려고 할 때, 생긴다고 생각한다. 둘째가 친구집에 다녀와서, 부럽웠던 점을 한참을 이야기하고 나서, 하는 말은, ‘그래도 난 우리집이 좋아’이다.
어른 사회의 문제는 ‘부러움을 부럽다고 솔직하게 표현하지 않아서‘ 생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부러움이 질투가 되고, 다시 비꼼이 되고, 그것을 빼앗아오기위한 방법을 찾게 되면서, 이 사회의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나 자신과 내 주변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며, 다른 사람의 모습이 부러울 때는, 그냥 쿨하게, ’정말 부러워‘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어른 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의외로 별거 아닌, 단순한 해프닝들일 수도 있지않을까?
가을쯤, 날씨 좋을 때, 온가족이 놀이공원 한번 다녀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