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짝 속에 담아 둔 할아버지의 사랑

궤짝 속에 담아 둔 할아버지의 사랑 궤짝 속 꿀 한 숟가락,

by 모송 정현숙

우리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신 할아버지는, 언제나 손님들로 집을 북적이게 하셨다


새벽 네 시. 어김없이 들려오는 소리에 잠이 깬다. 할아버지는 이미 세안을 끝내시고 하얀 한복을 정갈하게 입은 채 정좌하셨다. 이내 시작되는 시조 한 수.

"동~창~~~이 밝~았~느~냐~~"


깊고 울림이 있는 짱짱한 목소리가 새벽 공기를 깨웠다.

건넌방에서 안방까지 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진다.

나중에 알고 보니 민요 중에서도 가장 고결하다는 정가(正歌)였다.


그렇게 깨끗한 몸가짐으로 시조를 읊으시던 할아버지는 모두에게 존경받는 분이셨다. 어떤 사고 때문인지 오른쪽 엄지손가락이 없으셨지만, 중지를 뻗어 사이에 붓을 세워 글씨를 쓰시는 명필(名筆)이셨다. 그분의 품격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고모댁이나 작은댁에 외출을 나가시는 날은, 나에게는 잔칫날이나 다름없었다. 하얀 한복에 두루마기, 갓까지 갖추어 쓰시고 친구처럼 아끼시던 지팡이와 함께 외출길에 오르셨다.


대문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나는 준비해 둔 숟가락을 챙겨 들고 할아버지 방으로 들어간다. 나의 목표는 할아버지의 보물이 든 궤짝!


조심스레 궤짝을 열고, 공략에 들어간다. 일단 꿀부터 한 숟갈. 다음은 꼬들꼬들 물기 없이 살짝 볶은 번데기. 그 맛은 정말 기가 막혔다. 마지막은 꿀에 절인 통들깨 한 술. 문제는 한 숟갈로 끝내지 못한다는 것.

두세 번을 더 먹고도 욕심은 끝이 없었다.


'더 먹고 싶은데, 한 숟가락만 더 먹을까? 많이 먹어서 표가 날 텐데.' 수없는 갈등 끝에 결국 나의 욕구가 이긴다.


'딱 한 숟가락만 더…'


점잖으신 할아버지는 이 막내 손녀의 귀여운 도둑질을 모를 리 없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 말씀 없이 그 비밀을 눈감아 주셨다.


진정한 어른으로, 막내 손녀의 간절한 욕심까지도 깊숙이 보듬어 주셨던 그 사랑. 할아버지의 궤짝 속에는

귀한 주전부리 대신, 나를 향한 너그러운 마음이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사랑 #어린 시절추억 #가족에세이 #정가 #궤짝의 비밀 #번데기


할아버지


숟가락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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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댓글1


모송정현숙출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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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시인 입니다. 생활이 이야기가되고 이야기가 시가되는 글을 씁니다.훗날 딸,손녀들이 돌아보니 다 선물 같은 삶을 살다간 할머니를 그리워할수 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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