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ji Dec 13. 2023

Prologue. 스물여섯에 파리로 무작정 떠나다.




2017년 1월, 나는 평생 프랑스에 살겠다고 결심한 지 두 달 만에 파리행 비행기를 탔다. 울보 동생은 공항에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눈물을 쏟았다고 했는데, 정작 대학을 갓 졸업하고 나 자신밖에 몰랐던 스물여섯의 나는 한국을 떠나는 것만이 오랜 꿈이었던 것처럼 서둘러 떠났다.


언제부터 파리를 그리워했는지 모르겠다. 패션디자이너를 꿈꾸기 시작했던 초등학생 때부터였을 수도 있고, 고등학생 때 가족들과 갔던 유럽 여행에서부터였을 수도 있고, 믿거나 말거나지만 집 앞 요가 선생님이 해주셨던 전생 체험에서 최면에 걸린 내가 ‘파리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다 일찍 죽는, 주얼리 파는 빼짝 마른 여자’로 나를 소개했을 때부터였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돌이켜보면 한눈에 그 도시와 사랑에 빠진 건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파리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강렬하게 들었던 계기는 정확히 기억이 난다. 2015년, 그러니까 대학교 3학년 때 학과에서 진행했던 겨울방학 연수 프로그램으로 파리에 3주 정도 갔을 때였다. 그 당시 나는 독립영화와 예술영화, 그리고 책 읽기에 빠져지내며 우울함과 외로움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하던 아이였다. 학교에서 나는 복학생이자 아싸(아웃사이더)였고, 1학년 때 망쳐버린 학점을 회복하고자 조금씩 수업을 열심히 듣기 시작하던 때였다. 우리 학과에서는 파리의 한 미술학교와 연계하여 겨울방학 연수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었는데 신청자 중에서 스무 명 정도를 선발하여 패션 디자인 및 마케팅 수업을 3학점 정도 수강하고 돌아오는 프로그램이었다. 친구가 없던 나는 고민이 되었지만, 나에게 남은 마지막 겨울방학이었기에 신청을 했고 선발이 되었다.


파리에 도착한 첫날, 학과 아이들과 지도교수님, 그리고 파리 학교의 교수님들과 같이 저녁식사를 하던 때가 생각이 난다. 내 앞에는 중년의 프랑스인 여자 교수님이 앉으셨고 우리는 영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 교수님은 미술사와 철학을 전공으로 석사를 두 번 했다고 하셨던 것 같다. 나는 새삼 그 사실이 놀라웠고, 너무 멋지게 느껴졌다. 그 당시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가 개봉했던 때였는데 우리는 그 영화에 대해 이야기했고, 교수님은 나에게 시네마테크의 영화 전시관에 꼭 가보라고 했다. 식당에서는 내가 아는 음악들이 흘러나왔고, 골목마다 가득한 노란 불빛 사이로 커다란 보름달이 손에 닿을 것처럼 가까이 떠있었다. 나는 이 날 외롭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마담 그레(Madame Grès)의 드레이핑 수업, 샤넬과 디올 등의 드레스에 자수 작업을 하는 선생님의 자수 수업, 장 폴 고티에에서 모자를 만드는 모자 장인 선생님의 울 페도라 만들기 수업을 하며 오뜨꾸뛰르 하우스의 수공예 작업을 배웠다. 이 시간들은 정말 황홀했다. 한국에서는 항상 느릿느릿하다고 지적받기 일쑤였는데, 이 모든 수업에서 나는 가장 정확하고 아름답게 해냈다. 손작업을 싫어하는 친구들 것을 도와주는 것조차 재미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자유시간에는 시네마테크나 BnF 국립도서관 같은 곳에 가서 조용하게 혼자 글을 쓰고 파리를 마냥 걸었다. 식당과 카페에서 느껴지는 사람들의 여유로움, 책과 신문을 읽는 모습, 쓸쓸한 겨울 거리의 풍경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한국에서는 비둘기 같다고 하는, 어깨부터 얼굴까지 둘둘 감싼 커다랗고 투박한 진회색의 스카프를 한 나에게 교수님과 친구들은 파리지엔 같다며 예뻐해 주었다. 나도 처음으로 나 자신이 있는 그대로 좋았다.


그 이후로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고, 런던의 패션스쿨로 유학을 갈 준비도 잠깐 하던 중에 갑자기 어느 날 무작정 파리로 떠나기로 결단을 내렸다. 있는 그대로의 내가 좋았던 그 첫 기억이 파리였다는 게 아마 내가 파리에 살아야겠다고 다짐한 이유가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이제야 해본다. 그렇게 떠났던 파리에서 나는 고작 3년이 조금 덜 되었을 때 한국으로 돌아왔다.


나의 창대했던 목표에 비하면 실패한 경험이지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파리에서의 일상은 나에게 도전이었고,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큰 부분이 되었다. 내가 만난 사람들, 생각한 것들, 소중했던 시간들을 기록해 두고자 이 연재를 시작한다. 그리고 나의 이 기록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누군가에게 영감이 되고,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