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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_ 부재중전화(2)

첫사랑 우진이 이야기

by 윤지아

2011. 7.30.

"와 진짜 많이 먹었다. 여자 셋이 고기 6인분이라니!"

설희는 연신 깔깔거렸다.

"이건 일반적인 거야. 이 정도도 못 먹으면, 안되지. 우린 한창 클 나이라고!"

초롱이는 당연하다는 듯 으쓱거리며 마지막 남은 고기한점을 불판에서 가져갔다.

여름방학이 시작된 이후 토익준비, 취업준비에 바쁜 우리는 간신히 시간을 맞췄다.

많지도 않은 세명도 이렇게 만나기 힘들다니. 졸업 후엔 더 바쁠 것이다.

우리는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가끔 만나도 언제나 어제 만났던 것처럼 즐거웠다. 오랜만에 만났어도 지난번 헤어진 장면에서 이어지는 다음 장면처럼 자연스럽게.

“좋아! 노래방 가자!”

부평 로데오거리에 수 노래방은 높은 층에 위치했다.

뷰가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지하에 위치한 노래방들에 비하면 좋은 시설이었다.

오랜만에 불러보는 그 시절 댄스곡들. 낭만고양이는 오늘도 초롱이의 차지이다.

“바꿔, 바꿔~ 바꿔~ 모든 걸 다 바꿔~”

설희도 오랜만에 새끼손가락을 마이크 삼아 열창 중이다.

발라드곡 없이 친구들과 열심히 지르고 나니 답답함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느낀 해방감. 남자친구와 있을 때보다 여자끼리 있을 때 느끼는 동질적인 안정감이 있다.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 이해하는 것.

남자들과 대화할 때는 상상할 수 없는 완벽히 기대한(아니 그 이상) 대답이 돌아오고, 완벽히 기대한 다음 대화로 이어진다. 그건 하이파이브의 손뼉소리가 철썩 나듯 여자끼리만 느낄 수 있는 완벽한 소통이다.

집에 오는 지하철에서도 연신 떠들어대던 우리는 내리는 순간까지 아직 할 말의 1/10도 하지 못한 느낌으로 헤어졌다.

“잘 가! 전화해~”

역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기다렸다. 밤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지만 마을버스는 거의 1시까지 있다.

집에 돌아오니 부모님은 TV를 보고 계셨다. 고개를 돌려 왔냐는 짧은 인사만 건네주시고 다시 TV에 집중하신다. 방으로 돌아와 자연스레 라디오를 켜고 옷을 갈아입었다..

“근데 그 손님이 녹차빙수를 시킨 거였더라고! 딸기빙수가 아니고.”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초롱이가 해준 일화가 문득 생각나 피식 웃는다.

재밌었다 오늘은. 다시 고등학교 때로 돌아간 것처럼.

물론 난 그때도 힘들고 걱정투성이인 학생이었지만, 적어도 꿈으로 온 마음이 가득 차 있던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그걸 지금에서야 깨닫지만.

씻고 방으로 돌아와 일기를 적고 라디오를 끈 시간은 거의 새벽 2시.

친구들과의 즐거운 시간을 보낸 여운을 간직한 채 누워서 잠을 청했다.

오늘은 아침 늦게까지 늦잠을 자야겠다.라고 생각하며.


얼마나 잤을까.

얼마 전 새로 산 아이폰4가 울린다.

짜증 나는 진동소리. 지금 몇 시인 걸까. 눈은 뜨지는 않았지만 눈꺼풀 밖의 환한 주변이 느껴진다. 간신히 한쪽 눈을 뜨고 휴대폰 액정을 본다.

‘+0’ 뭐지. 처음 보는 번호.

정식이 일거란 생각이 들며 온갖 짜증이 섞여 나온다.

아직 호주에 있는 정식이는 평소 001,060 온갖 국제전화는 가리지 않고 다 사용한다.

난 내 일상의 루틴을 깨는 전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친한 친구와 조차도 전화보다는 카카오톡으로 대화하고, 내가 활용하고 싶은 시간에 확인하길 원한다.

전화는 그러한 내 루틴을 깨서 싫다. 내가 원치 않는 타임에, 원치 않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고 정식이와 대화하기 싫다는 건 아니지만, 호주생활에 향수병을 느끼고 있는 정식이는 정말 지나칠 정도로 전화를 자주 한다.

‘얘는 왜 아침부터 전화를 걸고 난리야. 하..’

전원키를 한번 눌러 진동을 끄고 다시 잠에 빠져든다. 잘 때만큼은 종우도, 우리 부모님도 나를 건드리지 않는다. 내 일정에 대한, 계획에 대한 다른 제삼자의 개입을 지독히도 싫어한다.

1분 정도 지났을까. 또 진동이 울린다.

‘하... 이 자식은 왜 이렇게 전화질이래’

이제는 정말 짜증이 가득 차올랐다. 어제 늦게까지 놀아 피곤해서 일어날 수 없었다.

다시 실눈으로 하얀 아이폰4를 뒤집어본다.

‘발신자번호표시제한’

순간, 혹시 진철이 일수도 있다는 생각에 멈칫했다.

정식이 일 확률도 있지만, 두 번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넌 항상 전화를 한 번밖에 안 하고 안 받으면 다시 안 걸더라~적어도 두 번은 걸어봐야지~ 실수로 못 받았을 수도 있잖아 “

예전에 진철이에게 했던 내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연락이 끊긴 지 벌써 세 달째다. 그럴 리 없을 것이다.

찝찝한 마음을 뒤로하고 다시 진동을 끄고 잠을 청했다.

이미 두 번이나 깼더래서 그런지 진철이가 아닐까 하는 기대를 해서인지 깊은 잠은 들지 못했다.

피곤한 가운데 온갖 추측들을 계산하느라 얕은 꿈에 빠져든다.


홍대거리를 거닐던 2006년의 여름 어느 날로 돌아갔다.

행복하지만 불안한 눈빛을 바라보며, 한참을 걷다가 장면이 바뀐다.

추운 겨울 부평 로데오거리다. 까만 비니 모자를 쓴 진철이가 다가온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숨이 막혀온다.

어떻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고민하는 순간 잠에서 깨 눈을 떴다.


‘몇 시지?’

시계를 보니 9시 40분.

꿈의 여운을 생각할 틈 없이 이불속에서 그대로 머리맡에 놓아둔 아이폰4를 들어 액정을 켜본다.

액정에 카카오톡의 메시지 알림 창이 떠있다

‘진촐이 핸펀‘

이불을 걷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후회가 밀려와 급하게 카카오톡 답장을 보냈다. 자느라 못 받아서 미안하다고. 곧바로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

갈라진 목소리로,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지아야. 나야 “

그래 이 목소리다. 아침마다 나를 깨워주었던, 나를 설레게도, 가슴을 쿵 가라앉게도 했던 이 목소리. 그 목소리가 새로 산 아이폰4에 처음으로 울려 내 귀에 닿았다.

오랜만이라 미안하다는 이야기, 1학기는 잘 마무리했냐는 이야기, 그동안 내 생각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 등 진철이의 말들은 꿈속의 멘트들처럼 내 귓가에 흐르는 느낌이었다.

이런 아침은 오랜만이라 비현실적이어서 나는 말문이 막혔다.

아까 꾸던 꿈의 연속이 아닐지 현실인지 아닌지 계속 의문을 품으며 그 목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그렇게 3개월 만에 우린 짧은 대화를 했고, 어서 자라고 전화를 끊었다.

여름이라 이미 해가 많이 위로 떠올라있는지 지나치게 밝다.

내방 침대 위 아직 이불을 다 걷어내지 못한 채 앉아서 휴대폰을 손에 잡고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아직 메일주소를 연동해 놓지 않은 아이팟을 확인했다.


‘Face Time 이진철 부재중(2)’

‘2’ 숫자 2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쓴웃음을 지었다.

마치 우리의 관계와 같아서. 두 번째 인연. 괜한 미련일 것이다.

아직 끝내지 못하고 한 번만 더 하고 애써 이어나가는.

서랍 깊숙이 넣어두기 전 그 아름답고 반짝이는 메모리얼체인을 다시 한번 손바닥 위에 꺼내보았다가 조금은 아쉬워하며 서랍 속에 넣어버리듯.

왜일까.

시차만큼이나 멀게 느껴지던 그 아이는 결국 한번 더 끝까지 나를 쫓아와 내 시간을 울렸다.

내 루틴을 깼지만, 화나지는 않았다.

전화를 싫어하지만, 그 목소리만큼은 예외였다.

그 아이만큼은 내 인생 어떤 순간을 비집고 들어오든지 허용될 것만 같았다.

조금은 두려워졌다.

서로를 완전히 놓을 수 있는 날이 올까.

언젠간 그럴 수 있을까.

휴대폰에 떠있는 그 부재중 숫자 2를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았다.



여름방학기간 나의 루틴은 아침부터 저녁 전까지 종우랑 도서관에서 토익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아침에 종우가 먼저 도서관 열람실에 자리를 맡아주거나, 또는 우리 집 앞으로 나를 데리러 왔다. 도서관은 인천 내에 있는 온갖 도서관들을 가리지 않고 다 갔다.

서구도서관, 주안도서관, 대학도서관, 시립도서관. 화도진도서관 등등.

각각의 도서관들에는 다 다른 추억이 있고,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다 다른 시간 속의 이야기들이다.

종우와 도서관 투어 아닌 투어를 하며, 가끔은 그 시절 그 얼굴들이 생각난다.

모두 잘 지내고 있을까. 아직 연락하는 친구들도 물론 많이 있다.

스마트폰으로 바꾸고 난 후 카카오톡을 실시간으로 할 수 있게 되어, 예전보다는 더 친구들과 연락하기 편해졌다.

아날로그 2G 휴대폰을 쓰던 시절. 친구에게 연락을 하려면, 무조건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보내야 했었다. 전달할 말을 꾹꾹 키패드를 눌러 적고, 지우고 했던 문자메시지가 주는 무게감은 스마트폰 시대만 살아갈 우리 다음세대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도서관이라는 장소는 아날로그 시절과 3G의 시절이 같이 혼재하는 곳이다.

학창 시절 도서부원을 6년 동안 하며 느꼈던 점은 도서관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공평하게 공존한다는 것이다.

같은 책장에 줄을 맞춰, 말없이 조용히 그 시절을 담고 묵묵히 존재한다는 것.

열람실에서 펼쳐진 책들은 누군가의 미래에 분명히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

쾌쾌한 헌 책냄새부터, 풀내음 나는 새책냄새까지 뒤섞여 완벽히 전 시대를 아우르는 곳.

나는 도서관에서만 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오랜만에 서구도서관에서 공부를 끝내고, 저녁까지 종우랑 먹었다.

오늘은 토익 모의고사 하나를 통으로 푸느라 너무 지쳐서 그런지 배가 고팠던 것이다.

도서관에서 집까지 오는 길목에 있는 토마토 분식점에서 같이 참치 주먹밥과, 부대라면을 나눠먹었다.

종우는 내 일상을 깨지 않는다. 언제나 내 일상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모든 것을 내 일정에 맞춘다. 내 루틴을 깨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종우는 잘 안다. 자신의 주장을 하는 일은 결코 없다. 심지어 먹고 싶은 점심 메뉴에 대해서도, 모두 다 결정권한은 나에게 준다.

이런 종우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도, 어느 순간 그 배려가 당연히 느껴지고, 때때로 지겨워질 때가 있다.


이런 나에게 영향력을 끼쳤던 사람이 있었다.

내 루틴을 깨더라도 화를 낼 수도, 화가 나지도 않는 사람. 내 마음을 한순간에 하늘로 날아올렸다가, 쿵 떨어뜨릴 수 있는 사람. 나를 언제든 휘두를 수 있는 사람.

진철이는 지난달의 그 연락 이후 또 아무 말이 없다.

카카오톡을 보내놓았지만, 그대로 씹혔다. 더 이상은 나도 연달아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음으로.

그냥 그 두 번째의 의미는 그것으로 끝이었으리라.


그날은 저녁도 먹고 들어와서 저녁시간이 여유로웠다. 오랜만에 방정리를 하고 있는데, 카카오톡이 울렸다.

"지아야, 나 너네 집 앞인데 잠깐 나올래?"

오랜만에 우진이에게 연락이 왔다. 근처에 볼일이 있어 왔다가 생각이 나서 연락했다며.

오랜만에 집 앞 놀이터에서 만나기로 하고, 대충 집에서 막 입는 쉬폰원피스 하나를 빠르게 뒤집어썼다.

우진이는 내 첫사랑이다.

첫사랑의 정의에 대하여 의문이 있긴 하지만. '첫'에 집중한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사랑'까지 운운할 나이는 아니니까.

우진이와는 초등학교 2학년때부터 4,5, 6학년 6년의 초등학교 기간 중 무려 네 학년이나 같은 반을 했다. 그리고 5, 6학년동안은 짝이었다. 한 반에 40명 이상, 총 12반까지 있었던 시절이었다. 한 번도 같은 반을 해 보지 못한 동창들이 잔뜩 있음을 고려하면, 우진이와의 인연은 참 특별한 것이었다. 세월이 지나 우린 이제 어린 시절 소꿉친구로 남았다.

사실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진이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일기장 지분의 80% 차지할 만큼 오랫동안 좋아했던 아이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종우를 만나게 되면서 그 지분은 종우에게로 자연스레 옮겨갔지만 말이다.


화장은 하지 않았다. 립글로스만 가볍게 발랐다. 헝클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대충 쓸며, 거울 속 내 모습을 보았다.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내가 진철이에게 원하는 게 이런 관계인 것일까.

아니다. 진철이를 언젠가 친구처럼 다시 만난다 해도 이렇게 자연스럽고 편하게 나갈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짜잔, 너 이거 모은다고 해서 하나 사봤어."

우진이가 소니엔젤 피규어박스를 내민다.

종우가 사주기 시작해서, 요즘 한창 모으고 있다. 뭐가 들어있는지 모르는 랜덤 피규어. 동물 3 버전을 사 왔다. 뜯긴 박스 사이로 랫서판다 모자를 뒤집어쓴 소니엔젤 머리가 보였다.

"뽑아도 꼭 너 같은 걸 뽑냐."

웃으면서 소니엔젤을 받아 들었다. 우진이의 초등학교 별명은 너구리였다.


오늘은 깔끔한 스프라이트 남방에 조금은 얇은 모직 넥타이, 각 잡힌 짙은색 면바지, 진 파란색의 로퍼를 신고 왔다.

나는 대충 낮은 샌들을 신고 나와서인지 키가 큰 우진이와 더 키차이가 많이 나는 것 같았다. 머리는 언제나처럼 정돈해서 뒤로 넘겨, 조금은 멋 부린듯한 모습.

여전하다. 자주 만나지는 않지만, 가끔 볼 때마다 거의 한결같이 깔끔한 모습.

어둠이 내린 아파트 단지 안 가로등에 비친 우진이의 얼굴은 잘생긴 모습이었지만, 나에겐 초등학교 시절 까불거렸던 그 얼굴로만 보인다.

아파트 단지 안 조그마한 연못의 다리를 건너 뒤편에 있는 놀이터로 향한다.

학원 수학선생님인 우진이는 남들이 쉬는 밤에는 수업을 하느라 바쁘고, 낮에 쉬는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은 8월 말부터 9월 개강 전까지 학원 방학이라며 찾아온 것이다.


우진이와의 첫사랑 이야기는 사실 별 사건이랄 게 없다.

여느 초등학생들이 겪는 순수하고 장난기 넘치는 그런 풋풋한 사랑이야기.

서로 꼬집고 때리고 장난치며 웃고 떠들었던 어린 시절의 사소한 사건들. 딱 그 정도다.

졸업 후 각각 남중, 여중으로 진학 후 보지 못했었는데, 딱 한번 버스 안에서 우연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날은 때마침 학교에서 인천상륙작전기념관으로 현장학습이 있던 날이었다.

그날은 사복이 허용되었기에 연한 베이지색 면바지에 하얀 셔츠 그리고 하늘색 터틀 조끼를 매칭했었다. 귀밑 3센티라는 엄격한 두발규정 때문에 어색히 짧은 머리를 어떻게든 꾸며보겠다고, 하늘색 민무늬 삔 두 개를 왼쪽에만 깔끔히 꽂고 나왔었다.

그 버스에는 우진이가 먼저 앉아있었고, 나는 우진이가 내릴 두 정류장 전에 버스에 탔다. 자리는 없었기에 운전자석 뒤쯤에 서서 손잡이를 잡고 옆 친구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중간쯤 앉아있던 우진이를 발견한 것이다.

우리는 눈이 마주쳤지만, 부쩍 성숙해져 버렸는지 어색한 마음에 서로를 힐끔거리며 볼 뿐 인사는 하지 못했다.

두 정류장 후 남중 앞에 버스가 섰고 우진이는 내렸다.

떠나는 버스를 바라보던 우진이의 시선을 기억한다. 그리고 멀어지는 우진이를 바라보려 몸을 창가로 가까이 숙였던 내 모습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1999년 그 당시에는 정말이지 서로 연락을 할 수단이 없었다.

중학교에 진학한 후 처음으로 버디버디라는 메신저가 등장했고, 그때 처음으로 PC방에서 우진이랑 쪽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것 하나는 우진이의 버디버디 아이디가 여자친구 이니셜이었다는 것. 섬세하고 여린 사춘기 소녀였던 나는 그 사실에 적잖게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마음으로만 서로 좋아했던 초등학교 시절. 어떠한 약속도 서로에 대한 확인도 한적 없지만, 그래도 막연히 서로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나만의 착각이었고, 짝사랑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그 충격.

그 이후에도 우진이는 참 활발히 연애를 했고, 난 그저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한 채 바라보기만 했었다.

중학교 때는 나와 제일 친했던 친구도, 그리고 고등학교 때 새로 사귄 친구도 우진이가 전 남자 친구라고 했었다.

우진이의 전 여자친구들은 오히려 나에게 우진이랑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물었고, 나는 그저 초등학교 동창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그리고 꽤 오랫동안 마음속 깊이 혼자 좋아했는데, 고작 초등학교 동창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사이라니.

고등학교 1학년의 어느 날. 나는 드디어 그동안의 서운함과 지난 세월 혼자 마음고생한 것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새벽에 연달아 우진이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었다.

사실 네가 내 첫사랑이었다고.

그랬더니 우진이의 답장이 연달아 들어왔다.


"사실 초등학교 때 내 첫사랑도 너였어."

"졸업식날 고백하려고 널 찾아다녔는데, 넌 이미 갔더라"

"그날 이후부터 쭉 내 첫사랑은 너야. 비록 고백하지는 못했지만. 내 마음속 첫사랑은 언제나 너였어."


서로의 마음을 5년 만에 처음 문자메시지로 확인했다.

서로 짝사랑인 줄 알고 있었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첫사랑이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그동안의 마음의 보상을 받은 날.

조금은 손발이 오그라들었던 그때 받았던 우진이의 답장들을 떨리는 손으로 일기장에 빼곡히 적던 내가 기억난다. 지금 생각하면 참 귀엽고 순수했다.


"오랜만에 봤는데 버스정류장까지는 손 잡아주면 안 돼?"

놀이터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난 눈앞에 우진이가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살며시 웃으며 손을 잡았다. 부드럽지만, 어딘가 쓸쓸한 기운이 전달되는 그 온기.

"다음에는 미리 연락 좀 하고 와, 너 볼 때마다 맨날 이러고 나오네"

버스정류장까지 우진이를 바래다주며 말했다.

"됐어, 넌 쌩얼이 제일 이뻐."

씽긋 웃으며 버스에 오르는 우진이.

움직이는 버스 안에서 창밖에 나를 향하여 손을 흔들어준다.

아직 손에 남아있는 그 온기를 느끼며 오늘도 무슨 일인지 모를 그 아픔이 치유되었기를 바랐다.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왔다는 말은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우진이가 이렇게 불쑥 나를 찾아올 때면 무언가 힘든 일이 있었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나 또한 종우와 싸우거나 마음이 불편할 때면 우진이가 가장 먼저 떠오르곤 했기에.

딱히 무슨 일인지 서로 묻지 않아도 기댈 수 있는 사람.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고, 얼굴만 본 것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그런 친구.

우린 서로 첫사랑이니까.

그저 서로의 존재만으로 위로를 받기에 충분했고 곁에 있음에 감사했다.


버스정류장에서 집까지 오는 길은 가까웠지만, 나는 일부러 동네를 좀 걷기로 했다.

2006년 그 여름. 그 아이를 생각하며 이어폰을 꽂고 생각에 잠겨 걸었던 그 거리를.

오늘 우진이와 만남에서 위로를 받은 건 우진이만이 아니었다.

그 손의 감촉은 왠지 진철이를 떠올리게 했다.

우진이와 이렇게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이유는 아마 과거의 불명확했던 감정들에 대한 서로의 확인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 대한 마음의 확인을 한 것으로 만족했고, 힘들었던 그 과거에 보상을 받았다. 앞으로 어쩌자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서로에게 첫사랑이라는 그 기억만으로.

언제든 와서 쉬면, 그 당시로 돌아간 것처럼 편안한 위로를 받는 그런 존재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조금은 특별한 깊은 우정.


진철이에게 내가 원하는 것은 이런 것일까.

과거에 대한 확인은 수도 없이 했고, 현재에만 집중해 보려 밸런타인데이 고백도 했다.

미래. 문제는 미래인 걸까. 서로가 원하는 미래가 달라서.

진철이와는 우진이와 같은 친구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진철이를 생각하면, 미래에 대한 걱정과 희망이 몰려온다.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그 무엇.

처음에는 손에 잡힐 무언가를 바랐고,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쥐고 나니 그것이 영원하기를 바랐던 이 마음은 절대 우정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산책을 마치고 집에 들어왔다.

서랍을 열어보려 손잡이를 잡았다가. 그냥 말았다.

아이폰을 들고 카카오톡 진철이와의 대화창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보낸 내 메시지가 바로 위에 보였다.

일상, 자연스러운 내용으로 멈춰진 상태였다.

end가 아닌 pause로 보이는.

나는 자연스럽게 한 달의 정적을 깨며, 메시지를 보냈다.

"나 오늘 초등학교 때 첫사랑 만나고 들어왔다~"

뜬금없이. 이게 뭐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자극성 스팸 광고문자 같은 느낌이다. 이미 한 달이나 침묵하고 있는 진철이가 이런 메시지에 눈하나 꿈쩍할까 싶다가, 읽기는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의외였다.

10분도 지나지 않아 읽음 표시로 바뀌더니 답장이 온 것이다.

"뭐? 누굴 만나고 왔다고?, 쉬는 타임에 전화할 테니까 기다려"

자극성 스팸 광고가 통했다니. 이게 웬일인가.

12시쯤 아이팟에 진철이의 페이스타임이 들어왔다.

"잉? 뭐야? 왜 평소보다 1시간이나 일찍 했어? "

한국시간 새벽 1시가 진철이의 쉬는 시간이라, 어리둥절했다.

"영국 서머타임 적용돼서, 1시간 시간 빨라졌어. 이제 한국이랑 8시간 차이 나"

평소보다 쌩쌩해 보이는 진철이는 오늘은 회색 티셔츠에 테두리가 하얀 반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휴대폰을 책상에 올려놓고는 주변을 이것저것 정리하는 모습. 바로 어제 통화한듯한 느낌. 진철이가 있는 내방 풍경.

인천과 런던을 잇는 이 시간의 거리.

12시 라디오 프로그램의 오프닝곡이 끝나고 DJ의 목소리가 방에 울려 퍼진다.

"뭐야, 아까 그 말 무슨 말이야. 누굴 만나?"

진철이는 아직도 책상 위를 정리하며 딴청을 피우는 듯 바빠 보이지만, 눈빛은 흔들림이 없다. 심지어 무표정으로 조금은 단호한 목소리다. 한 달만의 비현실적인 장면에 난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어 피식 웃어 보인다. 아까 보낸 메시지가 떠올라 입부분을 옷소매로 가리고 약간 화면 밖으로 벗어나 내 얼굴의 반을 숨겼다.

"지아, 경고야. 늦은 시간에, 안돼.."

흐르는듯한 목소리. 아직 난 그 아이의 손아귀에 있는 것일까. 어린아이 혼내듯 조금은 가볍지만 단호한 말투.

"아니 연락도 없고, 카톡도 씹으면서, 첫사랑 좀 만날 수도 있지~ 안돼?"

아직도 난 화면 안으로 다 복귀하지 않는다. 조금은 억울한 듯 투덜투덜거려 보았다. 진철이의 질투는 거의 처음 보는 것 같다.

"당연히 안되지. 적당히 해~"

진철이의 말에 난 웃음을 멈추고 다시 화면 안으로 들어왔다. 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웃긴다~ 한 달 동안 연락도 없었으면서 무슨. 난 우리 이제 사귀는 거 아닌 줄 알았지~"

확실히 해야 했다. 어느 쪽이든.

그것이 어떠한 결과든, 통화가 되었을 때 확인해야 했다.

"무슨 소리야. 당연히 사귀고 있는 중이지. 바빠서 연락 못했지만, 그러는 거 아니다 너."

진철이는 또박또박 따졌다. 그 모습에 어이가 없다가도, 왜인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확인한 것이다. 현재에 대하여,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 대해서.

진철이와 얘기를 하며 우진이가 준 랫서판다 소니엔젤을 만지작거렸다.

오늘도 우린 마치 어제 얘기한 듯 자연스럽게 대화했다. 저녁타임을 위해 조금 자 두라고 권하고 전화를 끊었다.


한 번만 더. 아무렇지도 않게. 한 달 전 보았던 부재중 전화(2)의 숫자 2가 떠올랐다.

나도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이어가는 두 번째 인연은 조금은 억지스럽고 부자연스러웠다.

그래도 현실을 말하고 싶지 않았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우린 이대로 각자의 일상에 아직 녹아있는 척 서로를 속였다.

그러나 그 아이도 오늘은 느꼈을 것이다. 이제 이 두 번째 인연도 꺼져가고 있다는 것을.

억지로 확인한다고 해서 이어나갈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오늘 이 순간만큼은 아직 우린 서로의 현재에 있다며 확인하고 싶다는 것을.

애써 부정하면서까지 꿋꿋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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