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월드가 다시 열리길 기다리며
2012년은 내 인생 가장 쓸데없는 짓만 한 한해였다.
아마 나뿐만이 아니라, 동시대를 산 청년들은 기간의 차이만 있을 뿐 거의 동일할 것이다.
나의 신분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취준생’
취업준비생이라니.
취업을 하면 하는 거지 취업을 하는 것에 대하여 준비를 한다니. 단어 뜻부터가 이상했다.
그 단어는 마치 취업 자체가 청년들의 목표인 것처럼 한정지어버렸다.
취업. 돈을 버는 것.
언제부터 한 사람이 태어나고 자라 공부하고 꿈꾸고 꿈을 이루는 과정 중 그 준비 과정을 한꺼번에 취업준비생이라는 이상한 한 단어에 몰아넣어버리게 된 것일까.
2월 졸업식날 난 법대 대표로 나가서 수료장을 받았다. 수석졸업이었다.
부모님은 무려 27년이나 뒷바라지한 딸에 대한 보상을 받은 듯 흐뭇하게 바라보셨고, 남동생도 특별히 차려입고 비싼 화장품 세트를 사들고 왔다.
종우도 잠깐 축하해 주러 들렀지만, 우리 부모님과 마주치기는 어색했기에 서둘러 돌아갔다.
아, 큰집의 작은오빠까지도 선물을 들고 찾아와 축하해 주었다.
그러나 화려한 졸업 뒤에 따라온 단어는 미취업 상태. 취업준비생.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 걸까.
무언가 된다는 것이 직업을 갖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일까.
직업을 물어보는 영어문장 "What do you do for a living?"처럼 먹고살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직업인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이미 예전 대기업을 관두어서는 안 되었다.
그곳을 그만두고 편입해 법대를 졸업한 것은 내 꿈을 좇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기업에 맞춘 적성평가 문제집을 푸는가 하면, 기업의 면접 족보를 찾아 네이버 카페를 헤매는 모습이다.
도서관에서의 의미 없는 공부들은 물론이고, 그놈의 토익점수는 더럽게도 오르지 않았다.
이놈의 영어. 지독히도 싫은 영어.
이상한 공부 같지도 않은 적성평가 문제집들을 풀다가 오랜만에 학교 때 교과서였던 형법각론이나 민법, 근로기준법 책을 펼쳐보면 그렇게 재밌었다.
진정한 학문에 대한 갈망. 내가 원하는 건 쓸데없는 적성평가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을 바탕으로 일을 할 수 있는 기업 법무팀에 들어가는 길은 너무 제약이 많고 좁았다.
결국 이런저런 필기시험을 치러 다니고, 면접을 보고, 떨어지고, 실망하고, 그렇게 지겹고도 길고도 기약 없는 1년을 보냈다.
죽은 듯 흐르던 2012년도의 암흑기에도 특별한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별한 일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가 필요할지 모르겠지만, 언제나 나에게 특별한 사건이라는 것은 그 아이와 연관된 것들을 의미한다.
과거 그 아이가 일상이었던 그 순간에도 그 특별함은 여전했었지만.
올해 가장 그 아이가 생각났던 때는 단연 명절인 설이었다.
작년 설의 기억이 나서이기도 했지만, 설 특선영화로 EBS에서 해주는 ‘왕과 나’라는 영화를 봤는데, 그 영화의 주인공이름이 Tom인 것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게 사소한 포인트가 사람을 지독히 외롭게 해 왔다.
그렇게 꾸고 싶어도 꿈에 한번 나오지 않던 진철이는 그날 밤 꿈에 나와 나에게 평소처럼 전화를 주었다.
아무도 마지막으로 싸웠던 일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고, 자연스러운 일상을 나눴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얼마나 생생했던지, 그럴 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한참 동안이나 통화목록을 뒤져보았을 정도였다. 아이팟 face time 목록까지 살펴보고 나서야 꿈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허탈함은 나를 더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이럴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그렇게 모진 이야기들을 했었는데.
결국 또 그 아이의 전화를 기다린다는 게 얼마나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인가.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결국 끝맺음을 지었던 그 연락은 마지막이 되기에는 일렀다.
그 아이는 나와의 인연의 끝을 놓지 못했다.
페이스북을 비롯한 모든 SNS에서 차단된 것을 확인한 후 진짜 끝이라는 생각에 아무런 기대도 없이 도서관과 집을 반복하는 생활을 하던 그해 4월의 어느 날.
엄마와 거실에서 오늘 푼 적성평가 문제를 이야기하며, 열 띄게 토론을 펼치다가 방으로 들어왔는데, 아이팟 Face Time이 울리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이름을 보고 내 눈을 의심했지만. 그러나 이번엔 꿈이 아니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작년 마지막 통화 이후 6개월 만이었다.
게다가 그 마지막 통화의 기억은 우리에겐 마침표였다.
아이팟 속 그 아이의 얼굴과 귀퉁이에 뜬 내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것이 현실인지 의문을 품은 채.
"연락하고 싶었지만, 쪼잔한 내 성격상 그러지 못했어. 미안해..."
멋쩍은 듯 시선을 피하는 그 아이의 목소리.
이것은 현실이었다.
"그래도, 술이라도 마시면 술김에라도 연락할 줄 알았어. 근데 페이스북 친구도 끊고 카카오톡도 차단하고..."
서운함이 폭발했다.
"그건 안돼. 왜인 줄 알아? 내가 술을 못 마시잖아."
어색하게 웃는 그 아이. 현실이다. 정말 현실이다.
그동안의 공백만큼이나 한 동안 둘 다 말없이 딴짓을 했다.
적막을 깨고 그동안 여자친구는 안 생겼냐고 물었다.
"여자친구는 없어. 너밖에 없더라"
그래도 이 말은, 그 마지막 통화가 서로 헤어진 것에 대하여 동의한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겠지.
작년 우리의 인연은 다시 한번 끊어낸 게 맞는 것이겠지.
이런 식의 헤어짐을 확인하면서도, 아직은 나밖에 없다는 그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돈다.
진철이는 내일 아침에 다시 전화 주겠다는 말을 했고, 끊은 후 난 아이팟 통화목록을 보았다.
‘Face Time 이진철 부재중(3)’
세 번이나 전화한 줄은 몰랐다고 카톡을 보내자 차단을 풀었는지 바로 답장이 왔다.
"딱 두 번 걸고 말려고 했는데 에잇. 한 번만 더 해보자. 하고 또 걸어봤어. 그리고 그다음에 네가 받은 거야."
강하게 끊어내었던, 매몰차게 끊어내었던 두 번째 인연을 진철이는 다시 그렇게 힘겹게 세 번째로 이어버렸다.
이러려고 매몰차게 끊어낸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기뻤다. 언제든 그 아이가 돌아올 곳이 나이기를 바랐기에. 대책 없이 바랐기에.
다음날 아침 당연한 듯 울리는 페이스 타임. 또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듯한 대화들을 나눴다. 우리가 언제 헤어진적 있냐는 듯. 자연스럽게.
그리고 정말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가 서로를 가질 수 없음을 잘 알면서 이렇게 모른 척하는 것이.
미래가 없는 현실의 대화 속에 늘어놓는 수많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들.
차라리 미래의 걱정을 무시한 채 현실을 살아내었던 그때가 나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마지막 발버둥임을 모르지 않기에 나는 오늘도 또 한 번 총대를 메어 일상을 끊어내었다.
"이제 얘기 좀 해.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 어떻게 하고 싶은지"
내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단호했다. 더 이상 이 아이는 나에게 일상이 아니다.
과거이고 추억이다. 이제는 그러고 싶다. 런던에서의 꿈같은 상상들은 나의 일상이 될 수 없다. 그러려고 대기업을 그만두고 법학을 공부한 것이 아니다. 그 아이에 대한 열정은 그저 모든 것이 불확실했던 대학 새내기 시절에나 꿀 수 있는 꿈이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이 아이에게 갈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아이도 모든 일상을 깨고 나에게 올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서로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확실히 해야 할 경계가 필요했다.
"예전이랑 똑같아. 난 너랑 결혼하고 싶어."
진철이도 마찬가지였다. 결판을 지어내려는듯한 단호함.
"그럼 네가 한국으로 오던지, 내가 영국으로 가던지?"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 아이를 알게 된 그 시점부터 존재했던 이 문제는 영원히 반복되고 있었다. 도무지 언제 끝날지 모르는. 2006년 그 수많은 망설임과 머뭇거림들.
어차피 이루어지지 못할 사이 시작도 하지 말자고 생각했던 시절.
그러나 차마 서로의 감정을 숨기지 못했던 어리고 순수했던 그 시절들.
결국 그때부터였다. 이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둘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매몰차게 끊어내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울며 휴대폰을 덮어버렸던 그날의 그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드디어 이 아이를 놓은 것이다.
이미 추억으로만 붙잡고 있었을 뿐 이 아이와의 현재와 미래를 꿈꾼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논쟁을 또 하게 된 것은 결국 진철이가 나를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나를 기쁘게도 슬프게도 했다.
"안 되겠다. 이제 나도 더는 못 기다려. 24시간을 줄게. 나한테 와줘. 내가 내일 전화하면 넌 대답하는 거야. Yes, No.. 둘 중 하나로."
이 대답을 요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버텨왔던가.
이 물음을 던지기까지 얼마나 많이 참아내고 얼마나 많이 두려웠을까.
그러나 이제는 그 아이도 지쳐버린 것이다.
이 질문을 던졌다는 것은 결국 No를 수용할 수 있을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는 이 아이도 나를 놓아줄 수 있는 상태에 놓였다는 것.
이 질문이 그 아이에게는 끝을 의미했다.
지금까지 우리의 만남 중 종우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았던 것도, 사귀거나 헤어진다는 경계를 분명히 하지 않은 모든 우리의 시간들이 그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No를 받아들일 수 없기에. 그저 애매하게라도 서로를 놓지 못하고 잡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 완전히 끝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어떻게든 붙잡고 있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질문을 던졌다.
때가 되었다. 나도 이제는 정말 끊어내야 했다.
어떻게 말을 전해야 할지, 아직은 24시간이라는 미확정의 시간이 있기에, 잠시 영국으로 가서 사는 내 모습을 다시 상상해 본다. 그리고 모든 영국에서의 삶을 버리고 나 하나만 보고 한국으로 온 진철이의 모습도 떠올려본다.
마지막이다. 이제부터는 이런 상상도 할 수 없을 테니.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저으며 현실로 돌아온다.
우린 각자의 나라에서 꿈꾸는 삶이 있고, 되고 싶은 것이 있다.
비록 서로가 함께 있고 싶다는 꿈은 같았지만, 그 꿈을 공유했다는 것과,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 노력했다는 것, 서로 각자의 생활을 포기해 보려 했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한 일이었다. 무모하게 자신을 던져버리는 열정이 있던 젊은 시절, 서로가 서로에게 꿈이었던 것만으로 충분했다. 이제는 더 이상 그 미래에 대한 미련을 가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시절 서로를 애틋하게 바랐다는 것만으로 충분했고, 그게 그 아이여서 감사했다.
2012년 12월
그렇게 이 소설을 시작한 첫 장면으로 돌아왔다.
그 아이는 내 대답을 듣지 않은 채 숨어버렸다. 사라져 버렸다.
그게 최선이었던 것이다.
No를 들을 용기가 없었기에, 아직은 놓을 수 없기에, 조금만 더 끌어보자는 마음이었으리라.
결국 이게 우리의 시차였다.
난 9시간이나 느린 영국의 시간을 기다려줘야 하는 것이다.
언제나 기다리는 건 나인 줄았다. 그러나 언제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틴 건 진철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숨어버린 그 아이에게 고마웠다.
결국 내 입으로 No를 말하게 하지 않았으니까.
정체된듯한 2012년도 결국 지나, 2013년도 봄.
드디어 나는 대기업 소송대리인으로 입사했다. 2년 계약직이었다.
졸업 후 첫 선택이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이라는 건 커리어에 분명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었다. 사랑이든 일이든 끝이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해서 시작도 하지 않는 것은 미련한 일이라고. 기한이 정해진 것이라고 해서, 시작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견뎌낼 추억의 여운을 하나도 만들지 못할 것이라고.
그리고 내 선택은 옳았다. 이곳은 나에게 기업 법무팀으로 이직할 중요한 경력의 발판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그 해 초 진철이는 영국 항공사에 입사해 승무원이 되었다. 승무원이 된 누나와 똑같이.
결국 한국에 있는 우리 학교를 선택했던 그 목적을 달성한 샘이다.
고맙게도 진철이는 한국비행이 있을 때마다 나에게 연락을 줬다.
일전의 24시간 내에 해야 하는 대답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우린 그렇게 자연스럽게 서로의 일상을 인정했고, 그 꿈을 응원했다.
진철이가 한국비행을 나왔을 때 몇 번 만났다.
부평 카페베네에서, 부평 나무그늘에서. 이전과 같은 장소에서 만났다고 해서 그때와 같은 마음은 아니었다. 이제 막 각자의 위치에서 꿈을 펼쳐내어 앳된 티를 조금 벗어나 아주 약간은 더 성숙해진 느낌이었다.
더 이상 현재와 미래를 나누지 않았기에, 가끔 만날 때면 우린 그 시절 이야기를 했다.
과거를 나누는 것이 아프거나 애절하지 않았다.
“근데, 조금 걱정되는 게 있어.”
진철이가 준 더페이스샵의 핸드크림 풀내음이 떠오르는 부평 나무그늘이었다.
조금은 편안해진 그러나 쓸쓸한 표정으로 진철이가 말했다.
“뭔데?”
오늘도 난 하우스커피의 하얀 커피잔을 만지작거린다. 창밖은 그때와 똑같이 67번 버스가 지나가고 있다.
“우리 어쩌면... 이렇게 계속 만나면 어떡해? 그러면 안 되는 때가 올 수 있잖아.”
조금은 곤란한 표정의 진철이의 눈빛.
그러면 안 되는 때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서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당연한 듯 말했다.
“글쎄. 그런 때가 오더라도 난 네가 연락하면 만나러 나갈 것 같은데”
난 씽긋 웃어 보였다.
“거봐. 너 이럴 줄 알았어”
진철이도 씽긋 웃었다.
정말 그런 때가 오면, 지금보다 한걸음 더 물러서서 서로를 지켜 봐 줄 수 있을까.
“지아야, 네가 우리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있다고 했잖아. 그거 나도 읽어봐도 돼? “
첫 회사의 약속된 계약기간 2년이 지나고 난 지독히도 야근이 심한 교육업계 법무팀으로 이직했다. 진철이가 한국비행에 나왔다고 페이스북 채팅으로 알려줬지만, 너무 바빠 못 만나고 넘어갈 때가 많았다.
첫 정규직이었고, 처음으로 제대로 법무팀 팀원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앞으로의 내 경력에 영향을 끼칠 큰 소송들도 많이 있었다. 일 때문이기도 했지만, 강남까지의 먼 출퇴근거리 때문에도 난 점점 말라갔다. 힘에 부쳤지만, 그 당시 나에겐 그것 말고 중요한 일은 없었다.
"다음 한국비행 때 또 연락할게~"
그때마다 진철이는 다음 한국비행을 기약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서서히 연락이 끊겼다. 누구 때문이랄 것 없이. 어느 순간부터인지 진철이는 한국비행을 나와도 나에게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몇 년 뒤 난 교육업계에서의 법무팀 경력을 바탕으로 제조업계 법무팀 팀장으로 이직했고 처음으로 내 팀원도 뽑았다. 조금은 안정되고 여유로운 생활을 누렸다.
드디어 종우와의 결혼 이야기도 오갔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가끔 들여다보는 그 아이의 페이스북에는 여자친구와 찍은 사진이 자주 올라왔다. 한국인 여자친구였다.
사진 속 환하게 웃는 그 아이의 얼굴이 못내 서운했지만, 그 옆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는 여자친구의 얼굴을 보고 난 인정 했다. 왠지 모르게 그 아이를 닮은 포근한 미소를 가진 아이였다. 나보다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조금은 쓰렸다.
자꾸만 서운한데 나까지 미소를 짓게 하는 그런 아이. 잘 되었다.
진철이는 결국 우진이와 같은 친구로 남지는 못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기도 했지만, 부평나무그늘에서 나눴던 대화가 자꾸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글쎄. 그런 때가 오더라도 난 네가 부르면 만나러 나갈 것 같은데”
그때의 내 말을 후회한다. 언제까지고 후회할 것이다.
그 아이가 나에게 다시 연락할 수 없는 것도 아마 그때 그 대화 때문일 것이다.
몇 번의 부재중을 남기면서까지 나에게 닿으려고 노력했던 그 내밀었던 손도 거둘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이 시차의 굴레를 멈추게 한건, 강제로 끊어내려 했던 내 모진 말이 아니라, 오히려 언제까지나 기다리겠다는 나의 그 말이었던 것이다.
아주 가끔 그 아이가 그리울 때면 싸이월드에 들어가 본다.
여전히 우리가 같이 보이는 대문 사진.
이곳에서의 시간은 멈춰있다.
싸이월드가 아직 운영 중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오늘도 today 1을 찍는다.
언젠가 진철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자신의 싸이월드 today 1을 보며, "다 너잖아."라고
맞는 말이었다. 모두 나였다.
2023년 9월.
멈춰진 싸이월드의 사진첩과, 다이어리가 복귀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지 얼마 안 돼, 또다시 서비스가 중단된 것 같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먼 과거로 날아가 투데이 1을 찍는 것도 언젠가는 할 수 없게 될 줄 알았다.
그리고 이제는 인정하게 된 것 같다. 아쉽지만 더 이상 붙잡고 싶지 않은.
그렇게 다 지나갔음을 인정하게 될 날이 온 것이다.
내 침대밑에 넣어둔 어린 시절 가지고 놀았던 인형들을 시집올 때 들고 와 또다시 침대 밑 구석에 넣어두었다. 꺼내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버릴 수는 없었다.
추억이란 그런 것이다. 다시 꺼내 보게 될지, 기억해 낼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저 내 공간의 일부를 차지하는 것. 내 기억 속 일부에 언제나 존재하는 것.
시간이 많이 지나, 추억은 띄엄띄엄 한 단어, 한 장면 정도로만 기억에 남아 버렸다.
그러나 아쉽지는 않다. 이 또한 자연스러운 추억의 여정일 테니.
그리고 충분하다. 너 하면 생각나는 것에 대한 목록에 더 이상 쓸 단어가 많지 않다 하더라도.
그 무겁던 추억의 무게가 많은 시간이 지나 변질되고 가벼워졌음에도. 괜찮다.
그럼에도 잊지 못할 싸이월드 너의 BGM 'F&F의 발버둥'은 오늘도 출근길 내 귓가에 퍼지고 있기에.